25일 타계한 김 전 명예회장은 반평생을 동아일보와 함께 했다.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전 명예회장은 58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68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한 뒤 그해 34세의 나이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이어 관리과장, 광고국장, 상무이사, 전무이사 등 줄곧 경영과정을 거쳐 87년 발행인에 취임했다.
취임 첫 해 동아일보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동아일보 측은 “고인은 군사정권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성역 없이 보도하도록 기자들을 격려하는 등 동아일보가 언론자유를 쟁취하고 수호하는 데 늘 앞장섰다”고 밝혔다. 90년대 들어 ‘제2의 창간’을 선언하며 충정로에 대형 사옥과 광화문에 동아미디어센터를 건립했다.
고인은 이후 언론인으로서 업적을 쌓아갔다. 95년에는 직접 중국을 방문해 리펑 총리와의 첫 단독회견을 일궈냈고, 98년에는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남측 신문 경영인으로는 처음으로 방북했다. 또 미국 뉴욕타임스, 일본 아사히신문, 러시아 이즈베스티야 등의 신문들과 제휴를 맺고 국제적 교류를 확대하기도 했다.
김 전 명예회장은 국악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한 이후 ‘완창 판소리 발표회’ 등을 주최했고, 90년에는 창극 ‘아리랑’을 모스크바 등 중앙아시아 9개 지역에서 순회 공연해 교포들의 애국심을 자아냈다. 또 동아국악콩쿠르를 만들어 국악인 양성에 힘썼으며 창극을 대중화하는데 매진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 받아 91년 노태우 정부 시절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교육 분야에서도 고인의 발자취는 뚜렷하다. 99년 고려대와 중앙중고교, 고려중고교 재단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 취임, 고려대 개교 100주년(2005년)을 전후해 지하중앙광장, 100주년 기념관, 화정체육관 등을 차례로 완공했다. 고인은 문민정부 당시 거액의 탈세사실이 드러나자 2001년 명예회장직과 이사직 등 동아일보사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그해 7월에는 탈세조사로 심적 고통을 겪은 고인의 부인이 투신자살해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한동 전 총리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사돈지간이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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