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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효자동 이발사'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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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효자동 이발사'와의 추억

입력
2008.02.25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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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도 밝았다. 또래들이 모두 학교 갈 때, 새벽에 이발소로 나가야 했던 서럽고 아픈 시절에도 바로 뒷집에 사는 그 형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해거름, 집 앞 골목에서 놀다 보면 어김없이 만나는 자그마한 키에 하얀 얼굴. 가던 길을 멈추고는 우리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곤 했다.

노모가 계셔 어른들은 모두 ‘뒷집 할매네 막내’라고 불렀다. 큰 형의 죽마고우이자, 다 깎은 머리를 털어 주고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야, 동글동글하니 참 예쁘다”고 말해 주던 내 어린 시절 이발사였다.

▦경북 북부지방의 한 작은 읍내. 가난은 유독 그 형에게 가혹했다. 열 세 살에 아버지를 잃은, 7남매의 막내는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이발사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청소하고 머리 감겨주는 아이였다.

서러운 세월을 참아가며 틈틈이 기술을 익혀 마침내 1년 뒤 자격증을 따 정식 이발사가 되던 날, 그 형은 친구들이 어른들 몰래 마련해 준 막걸리 파티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것으로 ‘고생 끝’이 아니었다. 가난은 그가 보충역 근무로 가위를 잠시 놓았던 시절, 대신 밥벌이 나선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읍내 목욕탕 이발사였던 그 형이 서울에 올라온 건 1978년. 아내와 함께 무작정 창신동 달동네에 보따리를 풀었다. 작은 읍내에 이발소가 너무 많아 고향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이왕이면 서울 명동 이발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은 고향과 ‘하늘과 땅 차이’였다. 헤어스타일부터 달랐다. 톱니모양의 숱가위도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쫓겨나길 십 수번. 그럴수록 이를 물었다. 중고 숱가위를 사서 손이 헐도록 화장실에서 몰래 연습했고, “월급 필요 없다. 기술만 가르쳐 달라”며 매달렸다.

▦그런 고생 끝에 롯데호텔 ‘소공동 가위손’으로 살아온 지 28년 6개월. 신격호 롯데회장, 정주영 전 현대회장 등 수많은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그에게 머리손질을 맡겼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도 15년째 이어지고 있다.

충분히 서로 편안하게 머리를 맡기고, 머리를 깎을 수 있는 세월이 됐다. 여기에 가난을 이겨낸 것까지 닮았으니 그 형이 이 대통령을 따라 ‘효자동 이발사’가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잘 몰라.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어째 이렇게 됐어”라며 쑥스러워 하는 박종구(55) 형. 아직도 40년 전 그때 밝고 순수한 얼굴 그대로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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