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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 입술 - 사랑의 기슭 또는 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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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 입술 - 사랑의 기슭 또는 봉우리

입력
2008.02.25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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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과 입술을 맞댐으로써 우리는 사랑의 기슭에 발을 들여놓는다. 구약성서의 <아가(雅歌)> 는 ‘뜨거운 임의 입술’을 그리는 신부(新婦)의 노래로 시작한다. 입술은 관능의 둥지이자 표적이다. 청년 서정주는 <화사(花蛇)> 라는 시에서 제 주체할 수 없는 관능을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에 쏟아 부었다.

성적(性的) 소구에 목숨을 건 상품 광고 제작자들이 입술 이미지를 그리 자주 써먹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우리들은 한 세상 잘 살아낸 배우들의(특히 여배우들의!) 입술을 기억하고 있다. 비비안 리의 입술, 마릴린 몬로의 입술, 마돈나의 입술을. 수백 년 전 여자의 입술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재현한 조콘다 부인의 입술.

■ 관능의 둥지이자 표적… 외설에 창을 낸 순애

꼭 관능이 아니더라도, 입술은 사랑의 반송대(搬送帶)다. <가난한 사랑노래> 라는 신경림 시의 화자는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을 돌이켜 보며, 사랑을 훼방놓는 가난을 한탄한다. <가난한 사랑노래> 식의 입맞춤, 곧 볼에 입을 대거나 입술에 입술을 포개는 입맞춤은 가장 헐거운 뜻의 사랑, 곧 절제된 사랑의 몸짓이다. 이런 입맞춤은 연인들끼리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예사로이 실천된다. 유다는 제가 곧 배신할 스승에게까지 이런 입맞춤을 실천했다. 프랑스인들은 이런 가벼운 입맞춤을 비주(bisou)라고 부른다. 또는, 다소 젠체하며, ‘새의 입맞춤’(baiser d'oiseau)이라거나 ‘정숙한 입맞춤’(chaste baiser)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에 반해, 영어 사용자들이 흔히 프랑스식 입맞춤(French kiss)이라 부르는(프랑스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깊다란 입맞춤은 치정의 몸짓이다. 이런 입맞춤은 대체로 연인들에게만 허용된다. 입술 대신에(또는 입술과 더불어) 혀를 부려쓰는 이 입맞춤은 일종의 섹스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도 입술은 사랑의(연애라는 뜻의 사랑 말이다) 기슭이다. 그 기슭을 지나야 우리는 봉우리를 향해 길을 잡을 수 있다. (나는 섹스가 연애의 시동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보수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입술을 쓰는 입맞춤이 섹스가 아니라 그저 밋밋한 정서적 발돋움의 몸짓일 뿐이라는 바로 그 점에 힘입어, 입술 둘레에선 온갖 성적 환상이 피어오른다. 혀는 들춰진 외설이지만, 입술은 외설의 달콤한 가능성으로 창을 낸 순애(純愛)다.

사하라사막 아랫녘 아프리카사람들의 입술은 대체로 도톰하다. 유럽사람들의 입술은 대체로 얄브스름하다. 동아시아사람들의 입술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도톰한 입술은 도톰한 대로, 얄브스름한 입술은 얄브스름한 대로, 제 나름의 관능을 내뿜는다. 그래도 사람의 허영심은 끝이 없다. 그리고 돈이 넘쳐나는 사람 가운데 일부는 그 허영심을 기꺼이 발휘한다. 타고난 입술을 좀더 예쁘게(말하자면 섹시하게) 만들기 위해 성형외과를 찾는 사람들이 꼭 결순(缺脣: 언청이)은 아니다. 문화적 전위에 선 젊은이들 일부는 제 입술에 피어싱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입술을 구속함으로써 입술을 해방한다.

수려한 용모의 이성(때로는 동성)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 입술을 감빤다. 사랑이 피어날 때 “그대 입술에선 꿀이 흐른다”(아가 4:11). 그 입술은 흔히 물앵두처럼, 석류처럼 빨간 입술이다. 그래서 서정주는 <고을나(高乙那)의 딸> 이라는 시에서 “석벽(石壁) 야생의 석류꽃 열매 알알/ 입술”을 노래했다. 사랑싸움을 할 때 우리는 입술을 비쭉 내밀거나 꾹 다물거나 실기죽거린다. 배반당한 사랑 앞에서 우리 입술은 파랗게 죽는다. 그 때, 우리는 입술을 꽉 깨물거나 바르르 떤다.

■ 사랑 앞에선 입술을 빨거나 깨물거나 바르르 떨어

15세기 한국인들은 입술을 입시울이라 불렀다. 훈민정음을 만든 이들이 잘 알고 있었듯, /ㅂ/나 /ㅍ/나 /ㅃ/나 /ㅁ/는 ‘입시울쏘리(脣音)’다. 현대 음운학자들도 이 소리들을 입술소리(脣音: labial) 또는 두입술소리(兩脣音: bilabial)라 부른다. 입술소리는 자음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소리다. 사람이 가장 먼저 익히는 자음이 이 입술소리다. 그러니, 아이들이 가장 가까운 가족을 부르는 이름에 입술소리가 들어가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한국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익힐 즈음, 유럽 아이들은 마마, 파파(빠빠)를 익힌다.

■ 입술소리는 자음 중 최초로 배우는 원초적 소리

‘입시울’의 시울은 시위(弦)라는 뜻이었다. 입시울이라는 말에는 입술 생김새를 활시위(弓弦)에 포갰던 중세 이전 한국인들의 상상력이 배어 있다. 그들에게 입술이란 입의 시위, 곧 구현(口弦)이었다. 시위(시울)는 줄이다. 활시위는 활줄이다. 그러니, 이 시울이라는 말에서 ‘실(絲)’을 뽑아내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시울은 ‘실’과 ‘올’이 어우러져 생긴 말이리라. (아닌가?) 그런데 <아가> 에 따르면, “입술은 새빨간 실오라기”(4:3)다. 아시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서 나온 상상력이 섬뜩할 만큼 닮았다.

이 시울이라는 말은 현대어 ‘눈시울’(중세 형태로는 더러 ‘눈시올’)에도 남아있다. 중세 한국인들이 보기에, 눈시울은 눈의 시위 곧 안현(眼弦)이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인들이, 제 상상력 속에서, 입술의 ‘술’이나 눈시울의 ‘시울’을 실오라기나 활시위와 포개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들 마음속의 소리-이미지 놀이터에서, 그 ‘술’이나 ‘시울’은 차라리 ‘살’과 이웃해있다. 입술은 입살이고, 눈시울은 눈살이므로. 어원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작동하는 이런 민중적 상상력이 입술과 눈시울을 진정한 사랑의 말로 만든다. 살이야말로 모든 사랑의 거처이므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젖어드는 것은 넓은 의미의 사랑 증세, 연민의 증세다. 그 뜨겁게 젖어드는 눈시울은 뭉클한 가슴과 이어져 있다.

중세어 시울은 현(弦)만이 아니라 현(舷)과도 대응했다. 현(舷)은 뱃전 곧 배의 양쪽 가장자리를 뜻한다. 말들의 생태학에서 흔히 관찰되듯, 시울은 시나브로 배라는 공간적 특수성을 잃어버리고 가장자리나 언저리 일반을 가리키게 되었다. (평북 의주 출신의 국어학자 유창돈 선생은 작고하기 두 해 전인 1964년 펴낸 <이조어 사전> 에서 ‘시울’을 ‘술가리’라 풀이한 바 있다. ‘술가리’는 ‘가장자리’나 ‘언저리’를 뜻하는 서북 방언이다. 남쪽에선 곧 잊힐 말인 듯해 적어놓는다.)

이리 본다면 입술은 입의 가장자리고, 눈시울은 눈의 언저리인 셈이다. 중세 한국인들이 입시울이나 눈시울이라는 말과 그 대상에서 대뜸 연상했던 것은 활시위의 생김새라기보다 차라리 뱃전의 생김새와 그 구실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입시울의 ‘시울’을 활시위라는 뜻으로 이해했던 사람들도 이내 가장자리, 언저리라는 뜻으로 바꿔 이해하게 됐을 것이다. 그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테니 말이다.

입술을 한자어로는 구순(口脣)이라 한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입술이라 불리는 것이 구순만은 아니다. 여성 생식기의 어느 부분도 음순(陰脣), 곧 입술이다. 두 기관의 닮음을 먼저 발견한 것은 서양사람들이었다. 입술을 뜻했던 라틴어 라비움(labium: 복수는 라비아labia)은 이른 시기부터 음순을 가리키는 말을 겸했다. 이 말은 지금도 쓰인다. 현대의 영어권 의사들에게도 대음순은 labia majora(큰 입술들)고 소음순은 labia minora(작은 입술들)다.

■ 남자들은 여성의 입술서 입술 너머의 것 보기도

입술을 뜻하는 현대프랑스어의 레브르(levres)나 현대영어의 립스(lips)에도 음순이라는 뜻이 있다. 예컨대 프랑스인들이 ‘큰 입술들’(그랑드 레브르 grandes levres), ‘작은 입술들’(프티트 레브르 petites levres)이라 부르는 것은 입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여성의 음부다. 식물학자들이 꽃부리의 모양에 따라 현화식물을 분류하며 순형화관(脣形花冠: labiate corolla)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때, 그들은 입술과 음순을 동시에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입술은 사랑의 기슭일 뿐만 아니라 봉우리이기도 한 걸까? 혹시 남자들은, 저들도 모른 채, 여성의 입술에서 입술 너머의 것을 보는 걸까? 순애가 아니라 외설을 상상하는 걸까? 의당 ‘망언다사(妄言多謝)!’를 외쳐야겠으나, 기회를 여투어두기로 한다. 앞으로도 더러 이런 망측한 말들을 하게 될지 모르니.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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