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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그 장비 사고싶다, 바꾸고 싶다… 나의 존재 이유니까!

입력
2008.02.25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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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과장으로 얼마 전 승진한 신영진(36ㆍ가명)씨는 직장에서 알아주는 오디오 광입니다. 하지만 떳떳하게 동료들에게 자신의 취미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주변에서서 자신처럼 2,000만원에 달하는 스피커 장비를 갖추고 AV(Audio & Video)룸을 꾸민 이들을 놓고 “세상에 별 사람 다 있어”라며 혀를 차는 말을 종종 듣기 때문이죠. 신씨와는 달리 오디오에 문외한인 그의 아내도, 남편이 음악듣기를 좋아한다는 정도야 알지만 설마 대형차 한 대 값의 비용을 취미용 장비 구입에 들였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신씨는 “알면 큰일 나죠. 갚아야 할 대출금이 얼만데요. 아내가 이 사실을 눈치챘다간 이혼당합니다”라며 손사래를 칩니다.

자신의 취미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유희를 위한 구매 수준을 벗어나 마치 전문가라도 된 양 최고급 사양의 오디오, 카메라, MTB(산악자전거) 등의 장비를 모으고 업그레이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일명 ‘장비병’(발음은 ‘장비-뼝’) 에 대한 얘기를 하렵니다. 물론 이 말은 신조어이고, 국어사전에 등재되지도 않았으며, 의사들이 지칭하는 병증도 아닙니다. ‘지름신’(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갖고 싶은 물건을 발견하면 살 수밖에 없는 심리상태로 몰아가는 어떤 기운을 지칭하는 신조어)처럼 우스갯소리로 만들어진 말에 불과하죠. 하지만 인터넷 등에서는 이미 보통명사처럼 떠돌아 다닙니다.

그런데 특이한 현상은 이 같은 장비병이 유독 우리 사회의 여성보다 남성, 그것도 어느 정도 사회나 가정에서 기반을 잡은 30대 이후 남성에게서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죠. “그냥 취미생활이 과한 정도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고 웃어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돈으로 즐기겠다는데 뭐라 할 말은 없겠습니다. 하지만 종종 외로움에 지치거나 딱히 정 붙일 곳을 잃은 남성들의 도피처로 장비병이 도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도가 지나쳐 기본적인 의식주를 생략하면서까지 장비 구입에 빠지고, 심지어 가족을 속이기도 한다니, 이 정도면 자제가 필요하겠죠.

장비병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혹시 일본의 ‘오타쿠’(심취해 집착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 문화가 우리 사회에도 나타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냥 소득수준이 올라가면서 취미생활의 질이 높아진 것일까요. 알고보면 장비병에는 조금은 복잡한 이유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일단, 취미를 위해 100만원도 안 되는 경차에다 억대의 음향장치를 설비할 정도로 장비병이 심각하더라도 다행히 치료할 병은 아니라니 안심하세요. 권준수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정신의학적으로 장비병이라는 질환은 없다. 아마도 단순히 고가의 장비가 성능 면에서 뛰어나기 때문에 구입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라며 “남보다 돋보이려는 심리에서 나오는 과시욕, 자신의 능력 부족을 장비로 보완하려는 심리가 있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는 장비병의 원인을 점차 가정과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한국 남성의 슬픈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분석합니다.

김 교수는 “인간은 몰두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무언가에 몰두하면서 느낀다.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 성공한다는 부모세대의 압박을 여성보다 더 받으며 자란 남성들이 더 이상 몰두할 대상을 찾기 힘든 30대에 이르면 일종의 공허감에 빠지고, 이를 보상받기 위해 알게모르게 장비 구입에 몰입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여성은 선천적으로 관계 맺기에 능숙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정체성을 찾지만 남성은 그러지 못해 취미에 집착한다“며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인터넷 사이트, 블로그 등에서 장비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것도 어려서부터 일종의 신분상승을 갈구해온 우리 남성들의 잠재의식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렇다면 장비병의 위험수위는 어느 정도일까요. 전문가들은 장비 구입을 위해 먹고 입는 데 들어가는 생활비를 줄일 경우, 혹은 가족에게 장비 구입사실을 숨기거나 비용을 속이고, 장비 구입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조절하지 못한다면 머릿속으로 “이젠 그만”을 외쳐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읍니다.

만일 당신의 가족이 장비병 증상을 보인다고 꾸짖거나 막무가내로 잘못됐다고 소리치지는 마세요. 어찌보면 장비병은 ‘알파걸 신드롬’, 그리고 부모와 자식 세대의 괴리 등으로 정체성을 잃어가는 우리의 젊은 남성 가장들이 공허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 환상의 오디오音 위해…"아내엔 쉿~ 들키면 혼나요"

“모아둔 총알(돈)은 없고 미치겠습니다.” “마눌님(마누라)이 알면 큰일인데…. 그래도 지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어요.”

B&W, 매킨토시, 캠브리지…. 자동차 브랜드 같기도 하고, 컴퓨터나 대학 이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오디오 마니아들에게 이것은 유명한 스피커나 앰프를 생산하는 브랜드 이름이다.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 때로는 억대를 호가하는 기기도 있다는 오디오의 세계. 보통 사람들은 사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기기들이지만, 여기에도 ‘장비병’ 환자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월급을 쪼개고 또 쪼개 주택부금 붓듯 고급 스피커 구입에 돈을 투입하고, 몇백만원 대 기기를 쓰다가도 새 기기가 나오면 금세 ‘바꿈질’(업그레이드)을 하는 사람들. 이들은 전에 쓰던 기기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라 새 기기를 쓰고 싶은 욕심 때문에 끊임없이 장비를 바꾼다고 말한다. 워낙 고가의 기기이기 때문에 기혼자들의 경우 아내와 겪는 마찰도 만만치 않다.

오디오 및 영상 기기 전문 인터넷 사이트 ‘DVD프라임’과 오디오 전문 사이트 ‘와싸다 닷컴’ 등에는 이런 남자들의 수다가 가득하다. 어느 회사의 앰프에는 어느 회사의 오디오가 어울린다는 식으로 서로의 오디오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글들도 올라오지만, “아내에게 싼 값에 샀다고 속인 오디오의 진짜 가격이 들통날까 조마조마하다”거나 “새로 스피커를 바꾸면서 아내에게도 옷을 사주기로 해서 지출이 두 배”라는 애환을 털어놓는 글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제대로 된 소리를 듣기 위해서 스피커와 앰프 뿐 아니라, 1m에 수십만원씩이나 하는 고급 스피커의 전선을 사려는 사람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용산전자상가에서 만난 정모씨는 “원하는 소리를 들을 때의 쾌감 때문에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원하는 소리를 얻기 위해서는 단지 돈만 투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줄자까지 동원해 소리를 최적화시킬 수 있는 스피커의 정확한 위치를 지정하고, 방음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열정도 필요하다. 오디오 마니아들에게 오디오 구입과 설치는 좋은 소리를 얻기 위해 벌이는 기나긴 ‘예술 행위’의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용산에서 고가 오디오 기기를 취급하는 엔터 AV의 김현철씨는 “평범한 직장인들이 열심히 돈을 모아 1,000만원대의 오디오 기기를 사고는 아이처럼 펄쩍 뛰면서 기뻐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며 “단지 비싼 장비를 마련하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원하는 소리를 얻기까지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명석 객원기자 lennonej@hk.co.kr

■ SLR카메라 치명적 유혹 "지름신·뽐뿌질 못말려요"

원두막, 덕팔이, 샤방이, 아빠번들, 오프로, 만두, 삼식이….

모르는 사람에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자다가도 귀가 번쩍 뜨이는 용어들이다. 사진, 또는 카메라 마니아들끼리 통하는 SLR세계의 인기 장비를 지칭하는 은어다. 10년 전만 해도 전문가들이나 만지는 물건이던 SLR(Single Lense Reflexㆍ일안 반사식) 카메라가, 이젠 두터운 향유층을 지닌 30, 40대 남자들의 장난감이 됐다.

SLR카메라가 대표적인 장비병 아이템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카메라는 영상을 2차원으로 포착하는 단순한 도구다. 하지만 이 도구가 디지털이라는 시스템의 혁명을 겪은 뒤부터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됐다.

찍고 결과물을 보기까지의 시간과 수고가 생략되면서, 사진은 가장 대중적인 자기표현의 수단이 됐다. 보고, 보여주는 데 익숙한 영상세대가 구매력을 지닌 30대가 되면서, SLR카메라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여기에 렌즈를 교환해 쓸 수 있다는 SLR의 특성이 ‘지름신’을 부르는 치명적 유혹이 됐다. 대부분의 카메라 입문자들은 보급형 보디(Body)에 번들로 끼워 파는 줌렌즈 하나로 사진을 시작한다.

사진을 좀 찍다보면 좀 더 밝은 렌즈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대구경의 렌즈를 할부로 구입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밝은 렌즈는 다시 신뢰도 높은 보디에 대한 ‘뽐뿌질’(구매욕구)을 부추긴다. 보유 장비가 중급 수준을 넘어 가면서부터는 스트로브 등 각종 액세사리도 사지 않고는 못 견딘다.

지름신의 유혹과 뽐뿌질에 수많은 남자들을 중독되게 한 결정적 원흉은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 SLR클럽(www.slrclub.com) 등 각종 사이트들은 사진 아마추어를 마니아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든다.

질투심을 유발하는 화려한 장비와 전투력을 샘솟게 하는 작품들, 장비의 유통을 쉽게 하는 중고품 직거래 코너는 단순한 호기심에 발을 담근 사람을 환자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30, 40대가 SLR카메라에 쉽게 빠져드는 또 다른 이유는 적정한 가격대다. 수천만원을 쉽게 뛰어넘는 오디오나 자동차 등과 달리, 싸게는 몇 만원부터 플래그쉽(각 브랜드의 최고가 모델)도 수백만 원이면 살 수 있다. 지름신을 버텨내다 결국 ‘카드신공’(신용카드 할부거래)을 펼치게 되는 까닭이다.

동호회 사이트에 가장 많이 오르는 사진은 갓 태어난 아기와 아내의 모습. ‘똑딱이’(콤팩트) 카메라로는 불가능한 화사한 가족의 모습은, 이제 막 가정을 꾸린 30대들이 SLR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드는 또 하나의 유혹이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 서바이벌 게임서 '최첨단 람보'를 꿈꾸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서바이벌 게임장.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투원들. 그런데 한 병사의 움직임이 둔해 보이더니 급기야 10분도 못 버티고 전사(?)한다. 그러나 그는 팀원들에게 별로 미안한 기색 없이 희희낙락이다.

그로서는 이미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사격술이나 뛰어난 전략 인지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게 10kg을 훌쩍 넘는 총과 미국 용병들의 전투 복장을 그대로 자신의 몸에 옮겨 왔다는 뿌듯함 때문이다.

M-16, M-4 등 M시리즈를 본뜬 소총을 주된 장비로 하는 서바이벌 게임. 기본 모델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임이지만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지름신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기본만 갖춘 국내 생산 소총 가격은 비싸도 20만원대.

하지만 각종 ‘드레스업(dress-up:치장)이 더해지면 수천만 원대로 껑충 뛰는 것이 바로 서바이벌 장비다. 여기에 군복, 권총, 보호 장비, 액세서리 등 부가장비까지 구비하려면 웬만한 중형차는 저리가라다.

군대 제대 후 10년 째 서바이벌 게임에 빠진 회사원 장일성씨(33ㆍ가명)는 장비에 투입한 금액만도 2,000여만 원에 이른다. 대학 시절 용돈을 아껴가며 장비를 구입하기 시작한 그는 대기업에 입사한 후에도 장비를 구입하느라 쓴 카드 결제 대금으로 월급이 고스란히 빠져나갈 정도다.

일부 장비는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어 해외에 사는 지인을 통하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기혼인 그는 이참에 회사를 그만 두고 게임 장비 수입을 전문으로 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장씨는 “사람들은 서바이벌 게임하면 총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장비 그 자체가 서바이벌의 묘미”라며 “고민 끝에 아내와 상의해 취미를 직업으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장씨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서바이벌 마니아들은 게임보다는 장비에 더 각별하다. 서바이벌 게임 동호회 HWC 소속 김찬우 씨는 “게임에 이기는 것보다 잘 갖춘 장비를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것이 더 큰 쾌감을 준다”고 말했다.

마니아들에게 더 정확하게 더 멀리 날리기 위한 튜닝은 기본이다. 10만 원대의 소염기부터 야간 전투에 필요한 60~70만 원대의 플래시라이트, 100만이 훌쩍 넘어가는 조준경 등을 갖춰야 어느 정도 구색이 맞는다.

또 내구성을 위해 플라스틱 본체를 알루미늄이나 아이언 소재로 바꾸고 그립, 탄창 등까지 모두 ‘드레스업’하면 1,000만 원대에 이르기도 한다. 잘 ‘드레스업’한 권총만도 보통 수백만 원대다.

소총 5,6개는 기본이고 많게는 10개 이상씩 소유하는 사람도 있다고 마니아들은 말한다. 여기에 600 달러대의 헤드셋과 30만 원대 고글은 물론이고 최대 800달러 이르는 바디아머 등도 이들이 갖춰야 할 부가장비다.

마니아들이 특히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트렌드와 컨셉트. 이라크에서 활동 중인 용병(PMC-Private Military Contractor)들이 이들의 모델이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들의 장비와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비용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서바이벌 장비 판매자는 “권총으로만 5,000만 원을 투자한 사람이 있을 정도”라면서 “현재의 트렌드와 자신들이 희망하는 컨셉트에 따라 구하기 힘든 아이템을 어떻게 든 구해 장착하면서 자기만족을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 1200만원 들인 MTB…"내 차값 2배지만 폼나잖아요"

본좌 올해로 산악자전거 세계에 입문한 지 어언 2년. 그동안 자전거에 들인 돈이 소형차 1대를 사고도 남을 만하오. 주위에서는 나이 서른여덟에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의 아버지인데도 아직 철이 안 들었다고 혀를 끌끌 차지만 건강을 챙기려고 하는 취미생활이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게다가 놀음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술 담배 끊고 용돈 아껴서 하는 것인데 오히려 박수를 쳐줘야 하는 것 아니오.

일단 본좌의 애마를 소개하오. 자전거의 몸체라고 할 수 있는 프레임은 티타늄으로 만든 것으로 알루미늄 제품과는 사뭇 다르오. 그래 봐야 자전거지 뭐가 그리 대단해 600만원이 넘는 프레임을 쓰느냐고 손가락질 할 양반도 있을 테지만 산을 오를 때는 팬티 한 장의 무게라도 덜고 싶은 마음이오.

당신들이 그 마음을 알 턱이 없겠지. 산악자전거를 타본 사람이라면 1~2킬로라도 가볍고 내구성 좋은 제품에 600만원을 투자하는 본좌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리라 생각하오. 유압식 브레이크에 완충장치, 기어에 페달까지 최고급으로 갖추면 대략 부속품 값만 600만원에 이른다오. 참,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옷이오. 차가운 공기는 막아주면서 땀만 밖으로 배출하는 소재로 만든 옷, 머리와 눈 보호를 위한 헬멧과 고글은 필수요. 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타다가 큰 부상을 입으면 안 되니까 말이오.

안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본좌 입문 초기에 인터넷에서 59만원을 주고 제법 괜찮다는 중고 장비를 샀다가 아주 낭패를 봤소. 비 오는 날 산에 올라갔다가 브레이크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비탈길에서 굴러서 갈비뼈에 금이 가는 것도 모자라 팔뚝을 20바늘이나 꿰맸지 뭐요.

물론 <산악자전거 가이드> 를 번역한 손건석씨가 ‘힘들면 쉬어라’ ‘자신이 없으면 과감히 내려서 자전거를 메고 가라’며 구구절절 늘어놨던 조언을 무시한 채 초보인 것을 잊고 무리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소.

내 비록 저렴한 중고차에 차 값의 두 배가 넘는 1,200만원 짜리 자전거를 매달고 다니지만 이 정도 장비를 갖추고 산에 오르면 일단 폼이 나지 않겠소. 솔직히 직장에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이기는 하나 동호회에 나가면 본좌는 최절정 고수요. 몸에 쫙 붙는 빨간 유니폼을 입고 애마에 오르면 내가 보기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드오.

고장 난 장비를 그 자리에서 고쳐주는 미케닉에서 상처 입은 사람을 돕는 메딕, 길을 찾는 옵서버까지. 본좌는 동호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만능 재주꾼이란 말이오. 회원들이 보내는 존경의 눈빛과 함께 주말마다 산 뽕(산에 오를 때의 쾌감을 동호인들이 일컫는 말)을 맞고 나면, 그 약발로 지옥 같은 직장에서의 1주일을 버텨내는 것 같소.

여하튼 단골 가게에 새로운 부속이 들어왔다고 하니 조만간 한 번 들러야겠소. 연말정산한 돈이 꽤 나왔으니 애마를 치장해야 하지 않겠소. 쉿, 내 아내에게는 비밀이오. 그 사람은 아직도 본좌의 자전거가 100만원 짜리인지 안단 말이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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