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건동 지음ㆍ박한제ㆍ김형종 옮김사계절 발행ㆍ820쪽ㆍ3만9,000원失明… 反共… '중국 사학의 巨頭' 진인각의 삶 생생히 그려내
“늘그막에 세 번에나 난리를 당하니/ 눈물이 마르고 피가 쏟아지는구나.” 1945년 항일 전쟁의 끝자락, 55세의 노학자는 또 황망히 비행기에 오르면서 피를 토했다.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인데다, 고서를 연구하느라 뒤늦게 두 눈까지 먼(망막 각리) 그에게 역사의 격랑은 가차없었다.
진인각(陳寅恪ㆍ1890~1969)은 중국 역사학의 거두이면서 종교학, 언어학, 고증학, 문화학 등에서도 르네상스적 인간의 이상을 구현한 인물이다.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대껴야 했던 마지막 20여년은 기구한 한 편의 드라마다.
중국 문화사가이자 극작가인 육건동이 1995년 ‘어느 중국 지식인의 운명’이라는 부제를 달아 그 기막힌 세월을 생생히 복원한 결과다. 대만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본토에서 학자의 길을 택한 진인각이 환생했다. 도처에 진인각이 당시 심경을 읊은 한시를 실어, 시집을 읽는 듯한 감흥마저 자아낸다.
시대와 부대끼고, 마침내 승리하기까지를 기록한 이 책에서 1950~60년대 중국의 격랑을 재현해 내는 서술 방식은 대하 소설과 다를 바 없다. 끝까지 본토에 남아 각고 속에서 학문을 다듬은 진인각, 미국으로 건너가 공산당 천하를 비난하며 자신의 문명을 떨쳤던 호적 등 격랑을 건너가는 지식인들의 다양한 모습이 근거리에서 복원된다.
그가 지금도 호소력을 갖는 것은 당시 중국인으로서는 극히 예외적일 정도로 바깥 세계와 소통했다는 데 있다. 일본에서의 고등학교 시절을 시작으로, 독일ㆍ스위스ㆍ프랑스에서의 어문학 연구 10여년 결과, 그는 세계인으로 거듭났다. 1911년 스위스에서 맑스의 ‘자본론’을 원문으로 읽었을 정도다. 그럼에도 제자에게는 맑스ㆍ레닌의 견해를 추종해서는 안 된다며 경계한, 별난 한문학자였다.
책은 도처에서 이념의 맹목성과 허망함을 지적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유물론을 숭배하는 공산당의 강령에 복종하지 않은 대가로 ‘낡은 골동품(老古董ㆍ완고한 노인)’ 취급까지 받아야 했다.
신산 끝에, 그는 중국 사학의 거봉으로 살아 있다. 수당시대 통치자들의 열린 사고를 강조한 그의 이론(관롱집단설)덕에 중국은 역동적인 나라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국 민족의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만천하에 드러내 밝히자는 열정이고, 중국은 결국 다시 떨칠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용틀임을 예견한 듯. 5년에 걸쳐 이 책을 함께 옮겨낸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ㆍ김형종 교수의 유려한 역문 덕에 다음 장을 재촉하는 마음이 급하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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