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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낙타' 老시인이 걷는 여행길에 두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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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낙타' 老시인이 걷는 여행길에 두 바람이 분다

입력
2008.02.25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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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지음 / 창비 발행ㆍ127쪽ㆍ6,000원

신경림(73) 시인의 10번째 시집 <낙타> 엔 바람이 분다. 부지런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노시인의 옷자락이 일으키는 바람이다. 시인은 두 길을 걷고 있다.

인생의 황혼길과 낯선 이국의 길. 운율이 넘실대고 행갈이가 단정한 시편으로 전해지는 인생길의 바람은 편안하고 따뜻하다. 산문을 닮은, 격식없이 자유로운 시행(詩行)에서 이는 여행길의 바람엔 시인의 날선 현실감각이 묻어난다.

총 5부로 구성된 시집은 두 바람의 이야기로 대별된다. 1~3부에 수록된 29편의 시에서 신씨는 전작 <뿔> (2002)에서 비친 죽음에 대한 관심을 한층 심화한다. ‘저승인들 무어 다르랴 아옹다옹 얽혀 살던/ 내 가족 내 이웃이 다 거기 가 살고 있는데’(‘강 저편’)라며 이승-저승의 문턱을 낮췄던 <뿔> 에서의 시인은 <낙타> 로 건너와 생(生)과 사(死)를 심상하게 드나드는 경지에 이른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낙타’)

평생 무신론자로 살아온 시인이 슬몃 신(神)에 대한 관심을 비치는 작품도 눈에 띈다. 지난달 이집트를 다녀왔다는 신씨는 “피라미드, 스핑크스 같은 고대 유적을 보니까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존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분’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기엔 현실이 엄혹하다.

자연 재앙은 왜 하필 ‘제일 못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덮칠까 분개하던 시인은 ‘그분 너무 높이 계셔서 멀리 계셔서, 아래서 일어나는 일은 세세히 보고 계시지 못하는 것 아닐까?’(‘아, 막달라 마리아조차!’) 의심한다.

터키, 히말라야, 콜롬비아, 몽골, 미국, 프랑스 등을 밟은 지난 4, 5년의 편력은 4, 5부 22편에 기록됐다. 거스름돈이 없다는 핑계로 몇 배에 달하는 요금을 뜯어낸 터키의 택시 운전사를, 시인은 이튿날 아침 숙소 앞에서 만난다. ‘나를 알아보았는지 빙그레 웃는다. “하느님은 위대하시다.” 막 기도소리가 들리고 있는 참이다.

내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인샬라”’(‘인샬라’) 이국의 풍경과 그곳에서의 사연이 빼곡히 들어찬 시편들엔 세상의 낮고 비루한 것들에 눈맞추려 하는 시인의 마음이 오롯하다.

이 시들을 ‘여행시’라 칭하자 신씨가 정정했다. “원래부터 난 돌아다니면서 사람과 자연을 만나 대화하고 그들을 사랑하면서 시를 써왔으니, 내 모든 시는 일종의 여행시”라는 게 이유다.

늘 길 위에서 쓰여지기에 칠순을 넘은 그의 시는 노티가 전혀 없이, 이토록 명징한 것일까. “나를 돌아보면 나이 들면 철든다는 옛말은 말짱 헛소리”라며 웃은 시인은 “자기 생각이나 이념을 가르치려 들 때 시는 가장 재미없어진다”고 말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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