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총회 시즌이 다가오면서 기업의 경영을 바라보는‘큰 손’ 펀드들의 시각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다. 그 동안‘단순 투자목적’이라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씌워진 굴레에 갇혀 거수기 역할을 벗어나지 못했던 펀드들이 점차‘할 말은 하는’주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미래에셋을 필두로 한 대형 자산운용사들은 대량지분 보유 기업의 주총 의결권행사와 관련한 자체 기준을 마련해 시행 중이며 최근에는 자산운용협회가 전체 자산운용사들에게 권하는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까지 발표했다. 싫든 좋든 조만간 정기 주총에서 주요 경영안건을 상정하게 될 상장사들은 운용사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다.
■ 반대 의견 갈수록 늘어
21일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작년 말 공시 기준으로 운용사가 전체 지분의 5% 이상을 보유한 상장사는 코스피(131개)와 코스닥시장(104개)을 합해 총 245개사(중복 보유회사는 1개사로 계산)로 전체 상장사의 14%에 달했다. 이는 1년 전에 비해 36개사가 늘어난 수치로, 급증하는 펀드 규모를 감안하면 앞으로 더욱 많아질 공산이 크다.
운용사들은 더 이상 주가만 쳐다보는‘예스맨’이 아니다. 운용사는 펀드자산 총액의 5% 이상이거나 주식평가액 10억원 이상인 상장사의 의결권 행사 내역을 공시하도록 돼 있는데 2005년 회사측이 제시한 안건에 운용사가 반대한 비율이 코스피기업 0.28%, 코스닥기업 0.21%에서 지난해 각각 0.55%, 1.55%로 2~7배 이상 늘어났다. 운용사 관계자는 “반대표는 평이한 사안이 아닌, 주로 민감한 안건에 던져진다는 점에서 절대수치가 낮다고 반대비율이 미미하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운용사의 의견이 끼치는 영향은 이미 무시 못할 수준이다. 지난해 10월 동아제약의 경영권 분쟁 당시, 대세를 결정지은 것은 각각 10% 후반대의 우호지분을 업고 맞선 기존 대주주가 아니라 5%대 지분을 보유한 미래에셋,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였다는 점은‘펀드의 파워’를 극명히 드러낸 사례였다.
■ 의결권 행사기준 다양화
적지않은 비용을 들여 특정기업의 의결안건 분석 자료까지 구입해 주총에 대비하는 선진국 펀드들과 달리 아직 국내 운용사들은 담당 펀드매니저의 의견에 그대로 따르는 걸음마 수준이다. 하지만 일부 대형 운용사들은 수년전부터 자체 기준을 마련하고, 의사결정 과정도 다층화해 의결권 행사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최근 자산운용협회가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마련, 회원 운용사에 배포한 것도 이런 시스템적 대응을 독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덩치가 큰 만큼 가장 세부화된 기준을 시행중인 곳은 미래에셋. 기존의 다소 막연했던 기준을 지난해 2월 세밀히 나눴다. 과도한 배당요구를 지양하고 소액주주나 종업원 지분 확대를 지지하며 대표이사와 경영자의 직책 분리에 찬성하는 등 기존 단순 차익추구형 투자자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래에셋 관계자는“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내부 기준은 항목 수만 50개가 넘을 정도로 세분화돼 있다”고 말했다.
중소형주 중심으로 5% 이상 보유 상장사(55개)가 가장 많은 신영투신운용 관계자는 “굳이 의결권 행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경영진 면담요청 등을 통해 주주로서의 운용사 입장을 수시로 전달, 관철시킨다”고 설명했다. 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실제 지난해 운용사들은 상장사에 ▦최대주주 또은 대표이사 면담(26.1%) ▦자사주 매입 등 주가관리 조치(17.4%) ▦사업 및 인력 구조조정(13.0%) 등 수시로 다양한 요구를 했다.
■ 전망과 한계
하지만 아직까지는 운용사의 반대의견이 주로 이사 보수한도, 주식매수선택권 부여, 감사위원 및 사외이사 선임, 정관변경 등 비교적 사소한 안건에 집중돼 있는 상태다. 최근 들어 경영 감시가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펀드의 기본적 목적이 투자이익 회수인 만큼 치명적 악재가 아닌 이상, 굳이 반대표로 생기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신영투신운용 허남권 상무는 “지분을 5% 이상 샀다는 것 자체가 해당기업의 기본적인 경영과 실적을 믿는다는 의미여서 다른 주주보다 의결권 행사에 적극적이기는 구조적으로 힘들다”며 “내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이후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한 다양한 펀드들이 등장하면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도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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