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가(家)의 야구사랑은 각별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비롯해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등 그룹 오너들이 하나 같이 야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생전에 ‘왕회장’은 골프를 치다 ‘현대가 삼성을 이겼다’는 보고를 받으면 “아무렴, 그래야지”라며 박수를 쳤다.
현대가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 회장이 패배한 직후부터였다. 그룹의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야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인천을 연고로 창단을 제안 받았을 때만 해도 “국가적 대사인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에 전념해야 한다”며 고사했었다.
프로야구 참여를 모색하던 현대는 97년 무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개최 자금이 필요했던 쌍방울과 접촉했다. 현대는 쌍방울을 40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쌍방울이 유니버시아드 선수촌 2개 동 건립을 추가로 요구하면서 협상은 결렬됐다.
쌍방울 인수에 실패한 현대는 이현태 현대석유화학회장을 대한야구협회장에 앉히면서 아마야구 장악에 나섰다. 이어 94년 11월28일 실업팀 현대 피닉스를 창단했다. 피닉스는 말이 아마추어였지만 당대 최고 선수들로 이뤄진 ‘프로팀’이었다.
피닉스로 아마를 평정한 현대는 95년 8월 주당 37만5,000원에 태평양 주식 12만 주를 매입,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에 입성했다. 순수 몸값만도 450억원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이후 현대는 공격적인 투자로 단시간 내 명문구단으로 발돋움했다.
현대에 이상징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 현대는 연고지 인천 경기 강원을 신생 SK에 넘기고 서울 입성을 선언했다. 현대는 연고지를 내주는 조건으로 SK에서 받은 54억원을 두산과 LG에 27억원씩 나눠 주기로 했다.
그러나 대주주인 하이닉스 반도체가 구조조정으로 자금난에 허덕이자 이 돈을 운영비로 쓰고 임시거처 수원에 눌러앉았다. 하이닉스는 현대 주식의 76.2%를 갖고 있으면서도 2군 구장인 원당구장 제공 외에 현금은 한 푼도 지원하지 않았다.
현대는 2003년 정몽헌 회장의 사망으로 치명타를 맞았다. 정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2004년부터 야구단 지원을 중단했다. 사촌격인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연간 70억~80억원을 받고, 선수들을 팔아 구단을 운영했다.
근근이 버텨오던 현대는 지난해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았다. 현대자동차가 그룹 사정을 이유로 지원을 중단하자 돈줄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131억원을 지원 받아 생명을 연장했다. 그러나 끝내 현대가 자구책을 마련하지 못하자 KBO는 지난해 12월 응급조치를 발동했다.
농협중앙회, STX, KT와 협상에 잇따라 실패한 KBO는 19일 이사회를 열고 창업투자사인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의 프로야구 참여를 승인했다. 이제 현대는 법적 청산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96년부터 시작된 현대 신화는 이렇게 해서 12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최경호 기자 squeeze@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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