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준의 무역은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이다. 외국에서 상품을 들여와 사고 파는 무역업은 성에 차지 않았다. 제대로 된 무역을 하고 싶었다. 번듯한 생산공장을 갖추고 제대로 된 수출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회는 항상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오는 것일까. 나는 생각지도 못했고 흥미조차 없었던 제지사업을 운명처럼 시작하게 됐다. 순간적으로 돈만 투자해 놓고 경영엔 참여하지 않았던 ‘창동제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창동제지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해서 창동제지를 살리는 게 내 제지사업의 첫 임무였다. 지인의 권유로 창동제지에 투자했던 나는 한동안 창동제지를 잊고 지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보니 초기 자본금은 다 까먹고 부채만 떠안은 애물단지가 돼 있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결국 창동제지를 인수했다. 그러나 창동제지를 살리는 일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같았다. 당시 일본 등 여러 나라가 하루 700~800톤 이상의 제지를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창동제지의 하루 생산량은 20톤 남짓에 불과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제지회사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생존경쟁이 치열했다. 제 살 깎아먹기 식의 경쟁은 계속됐고, 원료를 통째 수입해야 하는 제지사업의 한계로 좀체 수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값비싼 원료를 들여와 싼 종이를 만들어내는 악순환은 피해야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부가가치가 높은 종이를 만들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종지를 생산키로 결심하자 마음이 바빠졌다. 제지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 일본이 특종지 생산으로 큰 부가가치를 올리고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무작정 일본 특종지 회사를 찾아갔다. 제대로 된 기술을 전수 받아 한국에서 특종지로 성공을 거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당시 일본에는 3~4곳의 특종지 생산 회사가 있었는데, 그들과의 접촉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일친선협회 서울 회장이었던 나는 일본 회장인 상공회의소 고토 회장을 찾아가 “두 나라 간 실질적인 협력을 위해 친선협회도 만들었는데 장애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일본 특종지 회사와 로열티를 지불하고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고토 회장은 “2~3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고, 드디어 며칠 후 끈질기게 접촉해도 좀체 만나주지 않던 시즈오카의 특종지 회사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일본 특종지 회사와 정식으로 기술 협약을 했다. 길이 보이지 않던 제지사업이 특종지 생산으로 탄력을 받았고, 다시 희망이 보였다.
사업이 막 본궤도에 오를 즈음, 특종지 소비시장도 어느새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지사업을 계속 끌고 갈 묘책이 필요했다. 그 때 떠오른 게 크라우드지 생산이었다. 크라우드지는 주로 시멘트 포대로 쓰이는 종이로 사업성이 있어 보였다. 곧바로 삼화 크라우드지 회사를 설립하고 생산에 들어갔다. 제지사업의 특성상 한 발 앞서 시장을 내다보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발 빠른 대처가 필요하던 때였다.
돌이켜보면 제지업은 늘 포화상태이던 시장, 원료를 수입해야 하는 한계 등 시작부터 장애가 많은 사업이었다. 그러나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극복하다 보니 제지사업에 대한 애정은 날로 커져 갔다. 일반 종이는 중국의 물량공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한국만이 생산할 수 있는 비싸고 좋은 종이로 경쟁해야 앞서갈 수 있었다. 이런 마인드가 지금의 삼화제지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뜻하지 않게 시작한 제지사업이 지금은 나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끈질긴 기업가 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일이다. 여러 지인들 덕도 빼놓을 수 없다. '인생에서 잊혀지지 않는 지기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내게도 잊혀지지 않는 지기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삼화제지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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