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이스토리아 멥 압솔메라”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1953년 10월16일 젊은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장대원을 이끌고 감행한 몬카다 습격사건이 실패한 후 법정에서 한 최후 변론이다. 이 한마디로 쿠바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그는 6년 후 자신을 재판정에 세웠던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며 복권에 성공했다.
‘무모한 모험주의자’ ‘무한한 낙관주의 혁명가’ ‘반제국주의자’ ‘악랄한 독재자’ ‘지독한 반미주의자’ ‘21세기 최후의 사회주의자’ ‘교활한 기회주의자’ 등 카스트로 앞에 붙은 수식어는 그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인생만큼이나 다양했다. 하지만 “혁명가는 은퇴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는 21세기에도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이자, 혁명이란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한 현실주의자였다.
혁명가 카스트로의 불행한 어린시절
혁명가의 출생은 부적절했다. 26년 8월13일 쿠바 동남부 오리엔테주 마야리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아버지 안젤 카스트로와 연인이자 후에 두번째 부인이 된 리나 루즈 곤잘레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
혁명의 시작은 무모했다. 27세였던 53년 미국의 괴뢰정권인 바티스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160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몬카다를 습격,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49명의 이탈자가 생기면서 봉기는 좌초됐다.
2년 뒤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카스트로는 몬카다를 습격한 날(7월26일)을 기념해 ‘모비미엔토_26_7(7월26일의 운동ㆍM_26_7)’을 결성한다. ‘M_26_7’은 쿠바혁명의 주축이자 쿠바 공산당의 전신이 됐던 카스트로의 당이었다. 이후 탄압을 피해 멕시코로 떠난 카스트로는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이자 혁명가인 체 게바라와 운명적인 조우를 한다.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조차 배우고 싶다고 고백했던 ‘혁명에 대한 무한한 낙관주의’로 난관을 극복해나갔다. 시에라 마스트라 산으로 숨어 들어간 카스트로는 게릴라전을 펼치며 세력을 넓혔고 3년 만에 마침내 바티스타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사회주의자와 혁명가 사이
혁명에 성공할 때만 해도 카스트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무정부주의와 민족주의에 가까웠다. 사회주의는 개혁의 도구일 뿐이었다. 카스트로를 사회주의자로 만든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쿠바 망명단체를 앞세워 카스트로를 전복하려 하자 61년 카스트로는 “혁명은 사회주의적이었다”고 천명했다. 미국과 대립하던 구 소련의 도움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계산이었다. 62년 미사일 위기 이후 구 소련과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고 쿠바는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접어들었다.
21세기 마지막 사회주의자와 독재정권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공산권의 붕괴는 쿠바를 폐쇄국가로 몰고 갔다. 국가경제의 80%를 구 소련의 원조에 의존하던 쿠바 경제는 몰락했다. 미국은 96년 쿠바에 투자하는 외국기업을 미국 법정에 세운다는 ‘헬름스_버튼’ 법을 통과시키며 그나마 쿠바로 흘러들어 오던 달러를 막아버렸다.
카스트로가 정권의 생존을 위해 혁명가의 열정을 버리고 독재자로 변질된 것은 이 즈음부터이다. 75년 쿠바공산당 1차 전당대회 이후 확고한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한 카스트로는 언론탄압과 지식인 감금, 정적의 숙청으로 쿠바를 ‘카스트로 제국’으로 둔갑시켰다. 아프리카 앙골라의 전쟁 영웅이던 아르날도 오초아를 귀국하자 마자 반부패 혐의로 처형했다. 2인자이자 후계자로 꼽히는 동생 라울 카스트로의 정적이란 이유에서였다.
손재언 기자 chinason@hk.co.kr
<저작권자>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