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독특한 풍경이라 할 치열한 ‘원조(元祖)’ 경쟁은 비단 음식점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자신이 새 시대를 여는 원조로 기록되고 싶어 하는 지도자들의 야망 경쟁은 한국정치의 익숙한 모습이다.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라는 딱지가 바로 그런 야망을 웅변해 준다.
■ 정권 바뀌면 무조건 과거 단절
이명박 정부는 그 어떤 딱지도 내세우지 않기로 했다. 원조 경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원조임을 과시하는 딱지의 값이 땅에 떨어진 현실을 감안한 것일 뿐, 역사에 원조로 기록되고 싶어 하는 이명박 정부의 ‘원조 콤플렉스’는 역대 정부들을 능가할 조짐이 농후하다.
‘원조 콤플렉스’가 나쁜 건 아니다. 야망이 없었다면 어찌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중요한 것은 야망을 옳은 방향으로 발휘하는 지혜이지 야망 자체는 탓할 게 못 된다.
그런데 우리 지도자들의 ‘원조 콤플렉스’는 과거와 단절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이전 정부들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으면서 모든 걸 ‘정치화’하려는 특성이 있다. 바로 이게 성공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 이유다.
뭐든지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욕은 과거를 부정하면서 기존 질서를 때려 부수는 걸로 시작한다. 주로 국민의 불만을 산 것들을 건드리기 때문에 처음엔 뜨거운 박수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박수는 오래 갈 수 없다. 실망과 저주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모든 국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국정의제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제건 어느 정도의 불만은 필연이다.
불만의 최소화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 일을 위해선 이전 정부의 경험에서 배우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원조 콤플렉스’는 이런 자명한 상식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혁명이 가능할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이런 착각은 이른바 ‘인(人)의 장막’으로 인해 악화된다.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겠지만, 대한민국은 두 개의 나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건 자신의 삶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 다수의 국민이 사는 나라다. 둘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과 가문의 영광이 좌우되는,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엘리트가 사는 나라다. 진짜 나라는 전자(前者)이지만, 언론매체는 후자(後者)를 진짜 나라로 간주하는 듯한 보도를 홍수처럼 쏟아낸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은 수천, 수만의 엘리트에겐 혁명과 다를 바 없다. 춥고 배고팠던 세월을 오래 보내다가 하루 아침에 고위직을 꿰찬 사람들에겐 문자 그대로 혁명이다. 노무현의 386 동지들이 5ㆍ16 쿠데타를 들먹이면서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고 큰소리를 쳐댄 것도 바로 그런 충격적인 감격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명박의 동지들은 입버릇처럼 ‘잃어버린 10년’을 외쳐댄다. 알 것도 같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가. 평소에 경멸했던 사람들이 모든 권력을 독식하면서 떵떵거리는 모습에 얼마나 고통스럽고 참담했겠는가. 노무현과 그 일행이 놀던 자리는 쓰레기차를 동원해 치우는 걸로도 모자랄 것이다. 포크레인을 동원해 다 뒤집어 놓는다 한들 사무친 한(恨)이 풀리겠는가. 여기에 이념이 동원되면 ‘탐욕’은 순식간에 ‘시대정신’이라는 포장을 둘러쓰고 모든 사람을 속이게 된다.
■ 겸허한 자세로 ‘전철 안 밟기’를
그런 혁명 사업에 열심히 임하더라도,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으려 하고 있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게 좋겠다.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며 ‘원조 콤플렉스’ 중증(重症)을 드러내는 일도 반복하지 않으면 좋겠다. 원조 경쟁은 족발집들에게나 맡겨두고, 겸허한 자세로 이전 정부의 경험을 공부해보는 게 어떨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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