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평양 중앙식물원에 세우려고 했던 250kg 짜리 자연석 표지석에 이런 글을 새겼다. ‘하나된 민족의 염원을 담아, 2007년 10월 평양,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자못 웅장한 이 표지석을 노 대통령은 무슨 연유에선지 그냥 되가져왔다.
두 달 반 뒤, 대선을 하루 앞두고 김만복 국정원장은 네모 반듯하고 조촐하게 깎은 70kg짜리 새 표지석을 갖고 몰래 방북했다. 거기 새로 새긴 글은 이렇다. ‘하나된 민족의 염원을 담아, 2007. 10.2~4. 평양 방문기념,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우리 언론은 표지석 크기가 거의 4분의 1로 줄어든 사실에만 주목, 요령부득한 해명 때문에 논란이 커졌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두 표지석의 차이는 무엇보다 ‘2007년 평양’과 ‘2007.10.2~4 평양 방문기념’에 있다. 애초 준비한 표지석은 북한의 안목에는 마치 노 대통령이 ‘통일 대통령’으로 평양 수복 기념물이라도 남기는 듯한 수작으로 비칠 만하다.
북한은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도 김정일 위원장의 위대한 업적으로 인식, 선전한다. 노 대통령은 두 번째 정상회담의 의미를 애써 과장한다는 비판을 무릅쓴 채 평양을 방문하고서도, 북한의 완고한 정체성 인식과 냉엄한 남북관계 현실을 무시한 채 어설픈 행동을 했다가 낭패를 당한 꼴이다.
청와대는 표지석 논란이 불거지자, 기념식수에 김영남이 나오는 바람에 남북 정상 이름을 함께 새긴 표지석을 세우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사실은 표지석이 너무 커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까지 나와 새로 만들었다고 말을 바꿨다. 보수세력의 음해가 햇볕정책의 성과를 가린다고 늘 불평하지만, 스스로 실질보다 허울에 매달린 잘못이 새삼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런 해프닝을 놓고 곧 물러날 대통령을 비웃기만 하는 것은 부질없다. 실용적 대북 정책을 표방한 새 정부는 여론 등 허울에 집착하지 않고, 북한의 정체성 인식 등을 정확히 헤아려 남북관계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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