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와 5.16을 겪으며 나는 어느덧 고교생이 되었다. 두 형이 문학을 전공했던 탓일까, 인문계 지망도 자연스러웠고 문예부 가입도 낯설지 않았다. 길종 형은 내가 하이네 시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 집 아래채에서는 매일 밤 셋째 형의 영어, 막내 형의 불어, 나의 독어 읽는 소리가 한밤 코러스처럼 울려퍼지곤 했다.
4.19 이후 형은 대학신문 기자생활을 하며 김승옥, 염무웅, 김현, 최하림 등과 동인지 ‘산문시대’를 발간한다. 자작 시집 ‘태를 위한 과거분사’를 출간하기도 하고 청록회라는 전국 대학 서클을 조직, 학생운동에도 매진하는데 그때 친구들 중 정치인 조홍래, 김찬진, 최인환, 한화갑, 법조인 김종구, 박일용, 기업가 권동열 등이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열심이었다. ‘운영(雲影)’이라는 운치 넘치는 호를 짓고 학교신문에 시도 발표하고 ‘등대클럽’이라는 서클을 만들어 전학년 학생회도 정예화하고 방송부를 만들어 조간신문에 실린 사설들을 발췌하여 아침 뉴스로 내보냈다.
형의 대학 졸업식 날이었다. 가족들이 꽃다발을 들고 식장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형이 학사모를 쓰고 있지 않았다. 등록금으로 시집을 내느라 졸업을 못한 것이었다. 당황해 하는 가족들 앞에 형은 껄껄 웃으며 친구의 학사모를 빌려 쓰고 왔다. 두 번 발걸음 할 필요 뭐 있냐며 아예 그 날 가족들과 졸업기념 사진을 찍어버렸다. 그날 큰형은 졸업 기념으로 한 학기 등록금을 더 주었다.
길종 형은 졸업하자 곧 서울신문 기자로 공채 되었다. 그러나 한 달도 못 되어 쫓겨났다.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이 후 계속 직장을 알아봤으나 그를 원하는 곳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형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어느 날 큰형이 형을 급히 찾았다. 큰형수의 말로는 큰형이 사표를 내야한다고 했다. 길종 형이 빨갱이 단체인 ‘민통학련’에 연루되었다며 그를 체포하기위해 중앙정보부원이 큰형의 근무처인 재무부에 찾아왔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빨갱이라니... ? 뭔가가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방을 팽개치고 형을 찾아 나섰다. 출판계, 언론계, 정계, 법조계... 그의 모든 인맥을 다 찾고 뒤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벨카가 미친듯이 짖어댔다. 그날도 뜬 눈으로 혹시나 하며 형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을 때였다. 벨카의 대문을 부숴버릴 듯 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급히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뛰어 나갔다.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대문 앞에 형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것이 아닌가. 쏜살같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검은 지프차의 꽁무니가 멀리 보였다. 식구들이 모두 뛰어나와 형을 집안으로 옮겼다. 형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갈기갈기 찢겨진 바바리코트를 벗겼다. 그리고 다 떨어진 구두를 벗겼다.
발이 빠지지 않았다. 다시 당겼다. 앙상한 맨발이 붉은 피를 뿜으며 빠져나왔다. 두 발바닥은 긴 칼자국으로 갈라져있었다. 숨이 막혔다. 나는 형을 꼭 껴안고 어찌할 줄 몰랐다. 모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도대체 누가 빨갱이라는 말이냐? 길종이가 왜 빨갱이라는 말이냐? 4.19의 주인공이, 군사독재에 항거해 시를 쓰고 학생운동한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 고교 2년생이었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할 생각도 없었다.
형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나도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 형의 곁을 지켰다. 형은 그동안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개처럼 정보부에 끌려갔던 이야기, 그들이 자백을 받으려고 했던 끔찍한 고문과 지금도 환청처럼 들리는 비명소리에 대해서 낱낱이 이야기 해주었다. 형이 살아서 돌아 온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혼자서 울고 또 울었다. 언제고 그들에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하였다.
형은 폐인처럼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졌다. 오랜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창 밖 나뭇가지 소리가 유난히 갈라지던 날 밤, 무교동 주막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형은 휴지처럼 구겨져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여권이 쥐어져 있었다.
형은 프랑스 항공사 에어프랑스에 취직하였다고 했다. 한국을 떠나기로 하였다고 했다. 한국 땅 어디에서도 활동할 수 없는 그가 결국은 조국을 떠난다. 그날 밤 형과 나는 밤새 술을 마셨다. 껴안고 많이도 울었다. 조국은 우리를 위해 울어줄 것인가? 길종 형은 1964년 3월, 나를 혼자 남겨두고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그의 빈자리는 나에게 너무나 컸다.
3개월 후 6월3일.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나는 고교생으로 유일하게 대학생 시위대에 끼어 미친 듯이 경찰들과 싸웠다. 중앙 중고생 3,000명을 이끌고 거리로 나셨다. 그가 없는 그 자리에는 내가 있었다. 나의 외침은 그의 몫까지 하였다.
나는 그 일로 학교에서 처벌을 받고 집 방구석에 쳐 박혔다. 혼자였다. 대학입시는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형처럼 대학입시를 위해 연탄불도 빼지 않았고, 참고서도, 사전도 입 속에 넣어 삼키지도 않았다. 그냥 맨 방바닥에 누워있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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