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나 랑방, 디올옴므 등 세계적인 패션하우스에 영입되는 꿈을 꾸죠. 전에는 불가능하다 생각한 일이지만, 지금은 할 수 있겠다 싶어요.”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작업실에서 만난 디자이너 정욱준씨는 10대 소년처럼 생기가 넘쳤다. ‘준지(JUUN.J)’라는 이름으로 파리 남성복컬렉션에 진출한 지 꼭 두 시즌째, 지난달 19일 두번째 파리컬렉션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해외 유명 패션유통업체의 잇단 러브콜을 받고 있는 그는 “조금씩 서광이 비치는 것 같다”고 흥분을 토로했다. 우영미씨에 이어 또 한 명의 재능 있는 남성복 디자이너가 해외 패션계에 ‘코리안’의 위상을 드높일 날도 멀지않은 듯하다.
“참 영악했다 싶어요.”
파리에서 ‘통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정씨는 대뜸 이렇게 답했다. 서울컬렉션에서 정교한 테일러링에 기초한 정장을 주로 선보였던 그가 파리컬렉션에서는 캐릭터 캐주얼 쪽으로 크게 선회했다. 승부처는 유럽인들이 가장 고전적인 품목으로 생각하는 트렌치코트였다. 첫번째 파리 진출 무대에서 정씨는 ‘해체’라는 주제 아래 트렌치코트의 정형화된 스타일을 해체하고 변형하는 과감한 시도를 통해 단번에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르 피가로 지는 ‘이번 컬렉션 중 가장 혁신적인 디자이너로 꼽을 만하다“고 호평했다.
“파리에서는 신인인데 뭔가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평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세루티, 웅가로, 랑방 등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슈트의 명가가 수두룩한 파리에서 슈트로는 도저히 승부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그렇다면 유럽인들의 고정관념을 확 깨는 실험적인 작업을 해보자, 한 것이 적중한 거죠.”
지난달 19일에 열린 두번째 쇼는 ‘몽따쥬’라는 주제로 트렌치와 바이커 재킷을 믹스하는 다양한 방법론들을 선보였다. 첫 쇼의 여운을 적당히 이용하면서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조이스 홍콩과 상하이, 홍콩 하비 니콜스, 밀라노의 단토네, 파리의 레클레어, 뉴욕의 세븐, 영국의 벨티스 등 세계 패션 애호가들이 선망하는 편집매장에 준지의 옷이 걸렸다. 액수로 따지면 14만 유로 정도,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정씨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한다.
해외 유명 패션업체와의 협업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지역에서 고급 패션진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탈리아 브랜드 멜팅팟의 ‘디자이너 프로젝트’에 2명의 외국 패션디자이너와 함께 참가한다. 상품은 5월께 유럽과 미주에서 동시에 판매된다. 영국의 선글라스업체 린다 패로우와 협업하는 선글라스 상품도 7월께 유럽시장에 선보인다. 린다 패로우는 그간 드리스 반 노튼, 라프 시몬, 제레미 스콧 등 유명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진행해왔다.
국내에서는 리복코리아와 함께 한 농구화 리뉴얼 프로젝트 ‘엑소핏 바이 준지’가 15일 정식 출시됐다. 리복코리아는 시장 반응을 보면서 이 상품을 글로벌 라인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갤러리아백화점으로부터 단독매장을 내주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이 모든 것이 정씨가 두 번의 파리컬렉션으로 해외 패션시장에서 적지않은 지명도를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파리는 무서워요.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성공과 실패가 즉석에서 갈리거든요. 그게 또 매력이기도 하죠. 파리에 진출하기 전엔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동양인이라 배척당하지 않을까’ 등등 온갖 생각이 난무했는데 기우였던 것 같아요. 어쩌면 해외에서 성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나 피해의식 아닌가 싶어요.”
정씨는 한국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에 대해 퍽 긍정적이다. 시기적으로도 때가 됐다고 판단한다. 1970년대 겐조,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 등 일본 디자이너들의 성공적인 파리 진출이 소니, 산요 등 일본 가전업체의 전성기와 맞물리는 것처럼 국내도 삼성, LG 등 글로벌기업의 뒷심을 받아 국내 디자이너들이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일본 기업이 전략적으로 자국의 패션디자이너들을 함께 끌고 갔다면, 우리 기업들은 아직 패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덜하다는 것이죠.”
처음에는 회당 2억원 남짓한 비용을 들이면서 파리에 가는 것이 과연 옳은가 고민도 많았다는 정씨는 다행히 이제는 연간 경비의 1/3 정도는 컬렉션 수익으로 메꿀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돈 때문에 평생 소원이었던 파리 행을 접었다면 도저히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그는 파리라는 치열한 패션 전쟁터에서 ‘비주류의 감성을 품은 주류’로 우뚝 서는 꿈을 꾸고 있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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