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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민망하고 낯뜨거운 발상

입력
2008.02.1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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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5공(共)' 직후, 정치부 기자 몇 명과 전 전대통령을 만나 환담한 적이 있었다. 그가 불쑥 질문을 했다. "한국일보 정치부는 요원이 몇 명인가요?" 이 무슨 소리인가, 언론사에 출입하는 '기관원' 이야기인가, 잠시 혼돈스러웠는데, 그를 자주 취재했던 선배가 "아, 부장 포함해서 OO명입니다"라고 답했다. 무심코 드러낸 그의 인식에 따르면 기자는 안기부(국정원)나 보안사의 '요원(要員)'과 다르지 않았다. 정치 담당, 경제 담당, 사회 담당 요원 등.

당시엔 요원 과잉 시대였다. 안기부 보안사는 물론 검찰과 경찰, 경찰은 다시 치안본부(경찰청) 시경(서울경찰청) 사직동팀(청와대 감찰팀)으로 나뉘어 독자적 '요원 체제'를 갖고 있었다. 기자와 공무원이 설렁탕 한 그릇 먹은 것까지 알고 다녔다. 큰 사건이 났거나 정책 발표가 있을 땐 구경꾼 속에서, 역전 대합실에서 반응을 살피느라 바빴다.

개인에게는 감시의 눈초리였고, 정부로서는 민심 조작의 재료로 쓰였던 그 역할을 그리워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몇몇 사안에 대한 이명박 당선인과 인수위의 발언을 듣다 보면 일반인의 심사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손톱만큼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지난날의 '요원 이야기'까지 들먹이게 됐다.

■ 5共식 '감시 요원'은 안 되지만

숭례문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재 직후 두 번 현장에 갔다. 출근길엔 눈으로 확인하느라, 오후엔 몰려든 시민들이 어떤 심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다.

기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99.9%가 기자 아닌 사람들이었다. 당선인 주변이나 인수위 관계자 가운데 그 때 현장을 직접 가보았던 이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당선인이 국민감정에 거슬리는 돈 문제부터 덜컥 꺼냈을 리가 없다.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접하기 어렵다면 그것을 제대로 전달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거나 갖추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인수위의 영어몰입교육 구상도 그렇다. 발표 직후 국내 모든 영어학원들이 외쳐댔던 만세 소리를 인수위만 듣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오렌지를 아린지로 쓰도록 하라'는 식의 뜨악한 훈시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학생들이, 학부모들이, 학교교사와 학원강사들이 뭐라고 말하며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 관찰과 탐지가 없다. "초ㆍ중ㆍ고교생 자녀가 없는 세대가 정권을 잡아서 그렇다"는 한숨도 듣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국민심정을 200% 반영했다며 새 정부는 대불산단의 전봇대를 들먹인다. 하지만 그것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해결책을 마련한 것이라기보다, 당선인의 기억에 남았던 숙원을 해소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실제 그 시기 당선인과 인수위는 충남 태안반도 원유유출 사고로 피눈물 흘리는 주민들의 호소를 전혀 듣지 못하고(않고?) 있었다. 곰곰이 짚어보면 이처럼 실제 국민의 심사와 괴리가 있는 쪽으로 새 정부의 관심이 돌아가는 사례는 적지 않다.

현장의 여론을 충실히 취재하여 전달하고 전파하는 것은 언론의 중요한 의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새 정부와 일부 언론과의 소위 '밀월기간(honeymoon period)'이 쉽게 끝날 기미가 없고, 무엇보다 새 정부 담당자들이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여론을 잘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신문과 방송을 피아(彼我)로 재단하는 바람에 많지 않은 여론수렴에서조차 편식증이 우려되고 있다.

■ 국민 마음을 너무 모르지 않나

국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하고, 최소한 알려는 노력은 기울이는 것이 리더십의 요체다. 잘 알아서 하니 따라오라며 깃발 들고 내달린다고 우르르 좇아다니는 국민은 이제는 없다.

오죽하면 옛날 옛적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감시하고 제어하던 '요원'까지 들먹이며, 좋든 나쁘든 일반인들의 생각과 현장의 목소리가 제발 좀 전달되기를 바라게 될까. 정말로 민망하고 낯뜨거운, 어이없는 발상이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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