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식을 해결해줄 계약 동거남을 구하려 명동의 댄스홀을 전전하는 화가 지망생 ‘진영’, 국선에 입선하고도 영화 간판 그리는 일로 근근이 살아가는 그녀의 애인 ‘경일’, 그녀에게 구애인지 모를 야릇한 편지를 보내는 경일의 친구 ‘준섭’, 진영에게 거금을 내밀며 1주일 동거를 청하는 청년….
소설가 한말숙(77)씨의 1957년 등단작 ‘신화의 단애(斷崖)’는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세련된 퇴폐가 느껴진다. 전후 암울한 분위기와 경직된 정신이 온존하던 당시 독자의 눈에 윤리, 종교를 아랑곳 않는 이 단편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한씨는 “내가 ‘진영’과 같을 거라 지레 짐작한 독자의 비난성 편지가 답지했고, 몇몇 남성들은 (당시 미혼이던) 내게 집적대려 우리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한국문학 논쟁사의 첫손에 꼽히는 김동리-이어령씨의 ‘실존주의 문학 논쟁’도 이 작품에서 촉발했다.
이 무시무시한 데뷔작을 시작으로 한국 전후문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던 한씨가 등단 50주년(2007년)을 기념해 11편의 자선(自選) 단편을 모은 <덜레스 공항을 떠나며> (창비 발행)를 펴냈다. ‘신화의 단애’를 비롯한 50년대 발표작이 3편, 60년대와 80년대 작품이 각각 4편과 1편, 2000년대가 2편이다. 이 중 10편은 올해 말 출간 예정인 작가의 영어 단편선집에 실린다. 덜레스>
50년대 작품 중 ‘장마’(1959)는 미국 유력 출판사인 밴텀북스가 64년 발간한 <세계단편명작선> 에 영역 수록, 8개국어로 번역 출간된 장편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 (1981)와 더불어 해외에서 한씨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농촌 마을에 들이닥친 홍수 속에서 갓 혼인한 젊은 부부가 겪은 소동을 그린, 자연주의 색채가 짙은 소설이다. 아름다운> 세계단편명작선>
68년에 쓴 ‘신과의 약속’은 한씨에게 제1회 한국일보문학상(당시 상명은 한국창작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이다. 식중독으로 입원한 어린 딸의 위급한 병세와 안절부절 지켜보는 어머니의 하룻밤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한씨의 서울대 은사이자 당시 심사위원장 손우성(2006년 작고)씨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인데 읽을수록 문체의 유려함, 생사를 다투는 엄숙한 사태와 (모친의) 경박한 심정을 함께 엮어가는 수법 등 작가의 관록이 우러난다”는 심사평을 썼다. 한씨는 “80년대까지 쓴 작품 중 유일하게 자전적 내용이 담겼다”고 말했다.
‘여수(旅愁)’(1997)와 ‘초콜릿 친구’(1983)는 작가가 출간 직전까지 표제작으로 염두에 뒀다는 작품. 유부남 사업가를 정부(情夫)로 둔 화가가 주인공인 ‘여수’는 관계의 부박함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해변 호텔의 서정적 풍경과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을 전한다. 전쟁통에 헤어진 풋사랑 연인이 두 번 해후한다는 줄거리의 ‘초콜릿 친구’는 비극의 역사 위 개인적 아픔을 담담하게-그래서 더 아릿하게 그렸다.
표제작과 ‘이준씨의 경우’ 등 2000년대 작품 2편은 미국을 방문한 중년 부인의 이야기로, 실제 도미(渡美)한 자녀를 둔 한씨의 경험이 녹아 있다.
일례로 작가가 장편 <모색시대> (1986) 이후 16년 만에 발표한 신작으로 화제가 됐던 표제작은 9ㆍ11테러 발발 직후 미국 방문 계획 취소 여부를 놓고 부군인 가야금 명인 황병기(72)씨와 한참 고민했던 일이 모티프가 됐다. 모색시대>
한씨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비록 창작은 안했지만 기존 작품을 해외에 번역 출간하는 등 늘상 문학과 함께였다”며 “앞으로도 쓰고 싶은 것이 몸에 들어차면 언제든 끄집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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