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잊지 말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상냥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예요// 샌프란시스코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여름엔 사랑의 모임이 열릴 거예요/ 샌프란시스코 거리에는/ 상냥한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있지요// 온 나라로/ 그런 낯선 떨림이 퍼져나가면/ 사람들은 움직이게 되지요/ 이곳엔 새로운 생각을 지닌/ 세대가 모여 살고 있어요/ 움직이는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잊지 말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여름은 온통 사랑의 모임일 거예요.”
앨버커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여객기 안에서 나는 계속 스콧 매켄지의 1960년대 팝송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을 흥얼거렸다. 그리고 이따금, 나보다 10년쯤 윗세대의 미국인들을 생각했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익힌 것은 1970년대초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가사도 가락도 단순해 따라 부르기가 쉬웠다. 샌프란시스코에>
이내 이 노래는 내 ‘개인기’가, 내 ‘십팔번’이 되었다. 그러나 머리에 꽃을 꽂는다는 것의 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안 것은 한참 이후였다. 샌프란시스코가 히피들의 공인된 둥지여서 이런 노래가 나왔다는 사실도 그 때야 알았다.
내가 1960년대 미국에서 청년기를 보냈다면, 이 노래의 메시지에 공감했을까? 나는 좀 어중간한 태도를 취했을 것 같다. 적어도 이 노래의 주인공인 ‘꽃 아이들(flower children)’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지는 못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히피들의 ‘사랑 모임(love-in)’이든 도적들의 산채 생활이든 어려서부터 단체로 노는 것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더구나 나는 인습에 대한 존중심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문화적 보수주의자다.
반전(反戰) 구호쯤이야 기꺼이 어깨를 겯고 함께 외칠 수 있었겠지만, 프리섹스나 마약 같은 거라면 어떨까? 나는 그것들을 비난하지는 않았겠지만, 찬양하거나 스스로 실천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 다문화성 인상적…꽃의 아이들은 없었다
그러니까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을 내가 자주 흥얼거리는 것은, <인터내셔널> 을 자주 흥얼거리는 것처럼, 위선적이다. 그러나 위선적이면 어떠랴?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것도 아니고 낮은 소리로 혼자 흥얼거리는 것뿐인데. 인터내셔널> 샌프란시스코에>
하물며 샌프란시스코행 여객기 안에서라면.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을 흥얼거리며 나는 들떠 있었다. 곧 다다를 도시가 내뿜을 자유의 공기가 느껴져서가 아니었다. 이제 세 밤만 더 자면 서울에 돌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들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그것은 한 달간의 미국 체류가 즐겁지만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마음은 인습을 그럭저럭 존중하지만, 내 몸은 규율을 잘 존중하지 못한다. 아무리 느슨한 시간표라 해도, 내 몸은 시간표에 잘 적응할 수가 없었다.
의무적으로 약속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내가 꽤 오래 전에 버린 삶의 방식이었다. 나는 규율 없이 살 수 있는 서울이 그리웠다. 태평양 건너에 서울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 태평양을 건널 참이었다. 들뜨는 것은 당연했다.
앞서 앨버커키를 되돌아보면서도 다문화라는 말을 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다문화성은 한결 더 인상적이었다. 이곳엔 앵글로색슨 분위기와 히스패닉 분위기에 더해, 태평양 건너의 중국과 일본 분위기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아시아 바깥의 차이나타운으로선 역사가 가장 오래고 규모도 가장 크다 한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튿날, 나는 날이 저물기 전부터 자정 가까이까지 차이나타운을 샅샅이 뒤지며 걸었다.
그랜트 애비뉴나 스톡턴 스트리트 같은 큰길만이 아니라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윈도쇼핑을 했다. 세인트메리공원의 쑨원(孫文) 동상 앞에선 잠시 경건해지기도 했다. 처음 걷는 거리들이지만 정겨웠다. 미국 어디에서보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마음이 편했던 걸 보면, 나는 결국 아시아인이었다.
차이나타운이 아니더라도,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의 다른 도시들보다 정겨웠다. 차이나타운을 빠져나와 숙소인 맥스웰호텔로 걸어올 땐,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는데도 불안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기관총을 들고 밤의 샌프란시스코를 누빈다는 중국인 마피아의 전설을 어느 자리에선가 들은 듯도 했지만, 설령 그들이 나타난다 해도 두려울 것 같지 않았다. 나를 제 식구로 여기고 해치지 않을 것 같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한국이나 유럽의 도시들에서처럼 밤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 전까지 들렀던 미국 도시들에선 거의 하지 않던 짓이었다.
밤거리를 활보하기 전엔 호텔 앞 일식집에서 초밥으로 배를 채우곤 했다. 그 집 주인은 한국인이었다. 나는 아시아에, 한국에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엔, 그러니까 2001년 12월 샌프란시스코 거리엔 기관총을 든 중국인 마피아도 없었고, 머리에 꽃을 꽂은 반전주의자도 없었다.
잭슨 스트리트의 뉴커머고등학교에서, 나는 그야말로 다문화적인 학생집단을 만났다.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뉴커머고등학교는 이민자 자녀들의 적응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는 공립학교다.
현대사 과목을 맡고 있는 로블류스키 교사는 나를 자신의 수업 일일교사로 학생들 앞에 내세웠다. 세계 각처에서 온 스물아홉 명의 학생 앞에서 나는 30분 동안 한국 현대사에 대해 얘기한 뒤 질문을 받았다.
한국이 어디쯤 붙어있는지 모르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교실 벽에 세계 지도가 걸려있지 않아, 나는 칠판에 세계 전도를 대충대충 그린 뒤 한국을 짚어주었다. 내가 그린 한반도는 일본열도보다 넓었다. 별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남북 분단선을 긋자니 크기가 그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았다.
학생들 가운덴 일본 아이들과 중국 아이들도 있었는데, 나를 별난 사람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세인트루이스의 웹스터 대학교에서도 학생들 앞에 선 적이 있지만, 그 때는 학생들로부터 받은 질문에 대답을 한 것뿐이었다. 학생들 앞에서 영어로 강연을 해본 것은 뉴커머고등학교에서가 처음이었다. 중간에 말이 막히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혀가 매끈매끈 풀렸다.
수업이 끝난 뒤, 나는 로블류스키 교사와 몇몇 아이들에게 한국 부채를 하나씩 선물했다. 미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주려고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것들이었다.
여남은 개가 남아있었는데, 샌프란시스코가 마지막 방문지이니 여기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주어도 좋았다. 태극무늬가 박힌 부채를 받아들고 학생들도 로블류스키 교사도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여학생 하나가 자기는 한국에서 왔다며, 내가 제게 건넨 부채를 제 일본인 친구에게 양보했다. 기특하다는 생각과 함께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아이는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넸고, 나도 엉겁결에 영어로 그 아이를 칭찬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와 주고받은 말이 꼭 연극 대사 같았다.
■ 귀국 눈앞…황홀한 야경 다시 볼 날 있을까
12월21일 새벽, 눈을 뜨자마자 화가 H의 서울 안암동 작업실로 전화를 했다. 서울 시각으로는 그 날 늦은 밤이었고, 가까운 술친구들이 그 자리에 모여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그 친구들 송년회는 H의 작업실에서 하는 것이 상례였다. 송년회 날짜를 미리 알고 있진 않았지만, 21일이 금요일이어서 혹시나 하고 전화를 해 본 것이다. 너덧 친구와 돌아가며 통화를 했다. H 작업실의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태평양 이쪽으로 전해졌다.
친구들은 택시 삯을 줄 테니 냉큼 오라며 약을 올렸다. 그 때처럼 그들이 보고 싶었던 때가 없다. 아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 전날 밤 차이나타운을 늦게까지 돌아다니다 호텔로 돌아온 뒤 몸살이 나기 시작했다. 서울로 돌아갈 때가 돼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 것이다. 그 날 오후 스탠퍼드 대학교에 들렀을 땐, 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래도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선 악착같이 금문교를 건너 마린반도에서 얼쩡거렸다. 마린반도에서 보는 샌프란시스코가 매우 아름답다 들었고, 나는 이 도시에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의 샌프란시스코가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내 상상에 절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외려, 어둠이 내리면서 해협 건너편에서 내쏘는 도시 불빛들이 더 아름다웠다. 그 불빛들 속에서 1960년대 ‘꽃의 아이들’이 실루엣을 드러냈다, 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빈 위장에 아스피린을 들여보낸 뒤 연이어 담배를 피워댄 탓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땐, 큰 숙제 하나를 해치워낸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나는 그 숙제를 겨우겨우 해냈다. 다시는 이런 숙제를 맡기 싫었다. 내가 우등생이 못 된다는 걸 새삼 확인했으므로.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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