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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숭례문 붕괴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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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숭례문 붕괴의 공포

입력
2008.02.1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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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나마 영국에서 살면서 유럽을 여행할 때 가장 부러웠던 것 하나가 어느 도시든 수백 년 전에 지어진 건물과 유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작은 마을에 가도 오래 된 교회와 성, 건물들이 있고 이들 대부분이 깔끔하게 관리되면서 언제든 관광객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수백 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 관공서로 사용되는 경우도 흔하고 오래 전에 닦여 마차가 다니던 길에 지금은 자동차들이 다닌다. 유럽 도시들 가운데는 오래 된 구 시가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새로운 도시를 외곽에 형성한 경우가 많다.

■ 600년 역사가 간 곳 없는 서울

그렇다 보니 시내 중심가는 그 지역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쉽게 과거의 흔적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고 자긍심을 가지게 되며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유럽의 도시들을 보면서 서울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착잡한 심경을 숨기기 어려웠다. 서울의 역사가 600년이 넘었다지만 우리는 서울의 어느 곳에서 그 역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서울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어느 도시에서 과거를 가깝게 만나고 이를 통해 현재를 배우며 살아 있는 역사를 느낄 수 있는가.

고궁이 있고 민속촌이 있고 여기 저기 박물관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저만치 떨어져 박제되어 있는 구경거리일 뿐 우리에게 의미 있는 역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의 한 복판에서 우리의 모습을 비추면서 오늘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역사가 아니다. 똑 같은 모습의 아파트와 숨 막히는 콘크리트 빌딩과 아스팔트로 뒤덮인 한국의 도시들에는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도시에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어떻게든 빨리 경제적인 부와 번영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조국근대화의 목표가 그것이었다.

사회적으로 '발전'이란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하고라도 빠른 시간 안에 경제적 부의 축적을 이루는 것을 의미했다.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먼저 돈을 버는 것이 곧 성공이자 발전이었다.

그런 가운데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따위의 일들은 당연히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개발'과 '보존'의 가치가 부딪힐 때 다수의 선택은 늘 '개발'쪽 아니었던가.

국보 1호 숭례문이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몇 시간 만에 소실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심경은 참담했다. 문화재 관리 소홀의 문제가 제기되고 책임론이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되물어보자. 우리는 진정 국보 1호 숭례문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뜨겁게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서울 시민 가운데 교통 표지로서의 가치 외에 숭례문의 가치와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숭례문은 정말 우리에게 600년 역사의 상징이었던가. 경제 성장과 효율성, 실용성만이 유일한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과거 유물에 대한 관리와 보존에 관심이 덜 가고 자원이 적게 배분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일 아닌가.

■ 국보 태운 건 속도와 발전 숭배

속도와 발전에 대한 물신적 숭배는 과거에 대한 부정, 역사에 대한 망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청계천이 '개발'되는 와중에 그 속에 담겨 있던 문화와 역사는 송두리째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발의 속도에 칭송을 아끼지 않았고 그 개발의 주역에게, 좀더 빨리 좀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기를 기대하며 표를 던졌다.

속도와 발전의 물신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숭례문이 힘없이 쓰러지는 장면을 지켜보며 분노에 앞서 공포를 느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김창남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저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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