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불만을 억누르지 못해 홧김에 불을 지르는 이른바 '묻지마'식 방화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숭례문에 불을 지른 채모(70)씨도 자신의 땅을 신축아파트 도로로 내 주면서 토지보상금을 적게 받은 데 따른 불만이 범행의 직접적인 동기였다. 채씨는 비슷한 이유로 2006년 4월에도 서울 창경궁 문정전 출입문에 불을 질렀던 전과도 있다. 전문가들은 "자기 불행을 남 탓으로 돌리는 충동 행위가 방화 등의 범죄로 나타나고 있다"며 "강력한 방화 재발방지 대책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묻지마' 방화 급증
노숙자 김모(46)씨는 숭례문에 화재가 난 10일 밤 11시와 11일 오후 2시 사이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주택 담장과 차량 등에 5차례 연쇄적으로 불을 질렀다. 이달 초 교도소에서 출소한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변변한 직업도 없이 노숙하는 나 자신을 비관해 범행했다"고 밝혔다.
취업난이나 고용불안으로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도 방화 심리를 자극하는 한 가지 원인이다. 지난달 30일에는 또다른 김모(29)씨가 "취업이 안 된다"며 홧김에 서울 도봉구 도봉동 일대를 돌며 7곳에 불을 지르다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이처럼 개인의 불만에 경제 불황이라는 사회적 요소가 더해져 방화 건수는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2002년 2,700여건이었던 방화 건수는 해가 거듭될수록 증가해 2006년에는 3,400건을 넘겼다. 또 2006년 방화 사건 910건을 대상으로 범죄 동기를 분석한 결과, '개인의 불만 해소'로 일어난 사건이 138건(15.2%)으로 가장 많았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히기 위해'(42건), '정신이상자에 의한 방화'(26건) 등이 뒤를 이었다.
대책은 없나
전문가들은 방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불만 표출이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사회 전체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표창원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불만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방화와 같은 방법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는다"며 "성격 이상 등의 문제가 있는 경우 방화나 폭력을 일으킬 수 있어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철저한 진단과 치료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사회 곳곳에 방화에 대비한 안전시스템을 마련해야 숭례문 전소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막을 수 있다. 이상현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CC(폐쇄회로)TV 등 가용한 장비와 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기본 보안시스템을 갖추되, 방화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 주요 시설에 대해서는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서울경찰청-남대문署 “또 만났군”
숭례문 방화 피의자 채모(70)씨 검거 과정에서 서울경찰청 수사라인과 산하 남대문경찰서가 각축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양 측의 '악연'이 새삼 눈길을 끌고 있다. 두 기관은 지난해 김승연 한화 회장 보복 폭행 사건 당시 수사 주도권 다툼을 한데 이어 이번에는 채씨의 주거지인 강화도에서 범인 검거 경쟁을 벌였다.
12일 경찰에 따르면 11일 채씨가 살고 있는 강화도 전처 집에 먼저 도착한 것은 서울청 강력계 형사들이었다. 이들은 문화재 방화 관련 전과자 조회 등을 통해 2006년 창경궁 방화 이력이 있는 채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판단, 오후 7시께 채씨 전처 집에 들이 닥쳤다. 하지만 채씨는 집에 없었다. 20여 분 뒤 역시 전과자 조회와 관련 첩보를 접한 남대문서 형사들이 목격자와 함께 채씨 전처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서울청 수사팀은 채씨 집을 나서 마을 탐문수사를 택했고, 남대문서 형사들은 채씨 집 주변 잠복 근무를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7시40분께. "채씨가 마을회관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서울청 수사팀은 마을회관 앞에서 채씨를 발견, 11일 행적을 조사한 끝에 미심쩍은 점이 많다고 보고 30분 후 긴급체포한 뒤 서울청으로 데려갔다. 남대문서 형사들로서는 눈 앞에서 채씨를 빼앗긴 셈인데, 이에 대해 김영수 남대문서장은 "강화도에 도착한 직원들이 '서울청 수사팀이 먼저 왔다'고 보고해 양보하고 철수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른 경찰 관계자는 "두 팀이 채씨 집에서 마주쳤고, 각자 판단으로 움직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남대문 수사팀은 당시 상황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다.
지난해 김 회장 보복 폭행 사건 때는 서울청 광역수사대 소속 오모 경위가 가장 먼저 첩보를 입수, 수사를 했으나 남대문서로 수사주체가 바뀌었다. 그러나 남대문서 수사팀은 사건 처리에 미온적이었고, 결국 한화 측의 로비 의혹이 불거지면서 남대문서와 서울청 수사라인이 옷을 벗거나 사법처리됐다.
박원기 기자 one@hk.co.kr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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