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윌리엄스와 에단 호크가 열연하고 피터 위어가 감독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는 1989년 미국서 개봉된 이래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관객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낳는다. 죽은>
톰 슐만의 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은 전통과 규율에 얽매인 채 아이비리그 진학에만 매달리던 명문 고교생들이 괴짜 교사를 만나 자신들의 잠재력과 자유정신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이런 줄거리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거의 시에 가까운 대사와 운율이다. 한국일보 외국어면에 이 영화의 스크립트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 영화의 한 장면에서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자기 내면과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며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라틴어 구절을 읊는다. 로마 때의 시에 나오는 이 말은 다양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바로 이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를 가진 '오늘 혹은 현재를 즐겨라'로 흔히 해석된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뉴욕 월가 사람들은 그럴 형편이 못 된다. 모두가 '서브프라임 쓰나미' 에 휩쓸려간 까닭이다. 그래서 이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빚진 시인의 사회(debt poets society)> 라는 풍자는 지금도 많은 공감을 얻는다. 빚진>
▦ 덕분에 월가의 이코노미스트와 애널리스트들은 시인이 됐다. '홍수처럼 범람한 서브프라임 손실 격랑 속에/고액 연봉자들마저 해고의 칼바람을 맞았고/신용시장의 위기는 FRB의장의 주름살을 늘렸네/파국을 막을 묘수는 어디에 있을까…' 연말이면 그 해에 발생한 큰 문제나 위기를 빗대 풍자시를 지어 지인들에게 보내는 게 전통인 월가에서 올해도 시제(詩題)는 서브프라임을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많아야 2,000억달러로 추정됐던 관련 금융회사의 손실액이 4,000억달러 대로 커질 것이라고 G7 금융책임자들이 시인했으니 말이다.
▦ 금융시장으로선 우울하고 비통하지만, 그래도 이들에겐 나름의 페이소스와 자책감이 있다. 부실 채권을 자산으로 한 위험한 상품을 판 자신들의 처지를 조롱할 줄도 안다. 하지만 우리 시장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든다.
장밋빛 일색의 주가 전망으로 돈에 쪼들리는 서민들의 마음까지 들뜨게 해 놓고도, 시장이 급랭하면 다른 상황논리를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증권사 자산운용 담당자들이 자기 회사가 만든 투자 보고서를 불신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말로는 투자은행 운운하지만, 정작 관심은 코 묻은 수수료다. 부채의식은 아예 없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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