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미국의 유일 패권의 시대를 지나 새 질서를 모색하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는 국제정치 담론이 중국을 휩쓸고 있다.
국제질서가 강대국들이 할거하는 ‘상대적 대국시대’, 동방과 서방이 경쟁하는 ‘후(後) 서방시대’, 미국이 여러 강국중의 하나로 전락한 ‘후(後) 미국시대’로 진입했다는 중국 지식인들의 주장이 신화통신 등 중국 관영 언론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다.
이들 지식인들은 이런 관점에서 미국이 대선을 통해 변화한 질서에 걸맞은 새 역할을 모색할 수 있을 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 내 이런 흐름은 지난달 18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 외교전략의 전제인 ‘상대적 대국시대’를 주창하면서 본격 촉발됐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세계는 1945~90년 양극시대를 거쳐 미국이 절대적 대국이었던 1991~2001년을 지나왔다”며 “30, 40년 내에 우리는 기존 강국과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등이 세계 질서를 논의하는 상대적 대국 시대를 맞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현 세계 좌표가 미국 패권시대를 지나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이 할거하는 시기로 접어드는 과도기라는 것이다.
이 발언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었다. 선샤오촨(沈孝泉) 신화사 세계문제연구중심 연구원은 “상대적 대국시대는 패권과 일방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며 “특히 중국, 인도 등 동방의 발흥을 애써 외면하려는 서방에서 나온 이 주장은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반증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언론들은 한발 더 나아가 지난 5세기간 대서양 양안간 서방 동맹, 즉 유럽_미국 동맹이 주도해온 질서가 9ㆍ11과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서방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논의로 확장한다.
미국이 선두에 서고 유럽이 책임을 분담하던 1차 대전 이후 서방 동맹이 이라크 전쟁 등을 계기로 균열하고, 결국 미국의 세계 질서 유지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중국 지식인들은 소련 붕괴 이후 변화된 질서에서 미국이 전략적 실책으로 슈퍼파워 지위를 잃었다는 프레드 캐플란 등 미국 논객들의 주장을 적극 수용한다.
캐플란은 냉전 당시 미국 패권의 원천은 군사력이 아닌 동맹이었지만 소련이 사라진 후 관리 실패로 동맹이 느슨해지면서 워싱턴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각국의 원심력을 통제하지 못했고,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투박한 일방주의는 이런 경향을 가속화했다고 진단한다.
결국 현재 어떤 독재자도 미국을 무서워하지 않고, 독일이 이라크 전쟁 결의안에 반대한 사례처럼 비(非) 반미국가들도 미국 반대편에 서는 데 두려움이 없다. 이란 핵, 북한 핵, 도하라운드 등의 지지부진, 교토의정서 불이행 등은 미국의 지도력 상실을 웅변한다.
광저우(廣州)일보는 “‘후 미국시대’에도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미국이 대선을 통해 보통국가로서의 새 전략을 모색할지 주목된다”고 주장했다.
중국 내 논의에는 패권국으로 도약하려는 중국의 ‘희망사항’과 중화민족주의를 지나치게 반영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세계질서의 변화를 서둘러 포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음미할 대목도 적지않다.
베이징=이영섭 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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