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한 등산전문잡지가 한국 실버원정대의 에베레스트 등정 의혹을 제기해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이 일어났다. 원정대는 한국 에베레스트 초등 30주년을 기념해 60대 이상 고령 산악인들로 꾸려졌는데 김성봉(66) 대장의 정상 등정은 분명했으나 다른 한 명의 등정이 의혹을 샀다.
우리나라 해외 고봉 등정 역사는 의혹을 안고 시작됐다. 고산 등반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70년 세계 최초로 추렌히말(7,371m) 등정에 성공했지만 뒤 이어 오른 일본 원정대가 의혹을 제기, 쌍방이 공방만 거듭하다가 끝났다.
1983년 12월 국내의 한 여성 산악인이 안나푸르나 겨울 시즌 첫 등정에 성공했으나 수년 후 폴란드의 유명 산악인 쿠쿠츠카가 자서전에서 의혹을 제기,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겼다. 이 책은 셰르파의 폭로를 막기 위해 돈을 주고 입막음을 했다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1995년 말 경남의 한 젊은 산 꾼이 자신의 등정을 부인하는 폭탄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다. 그는 1989년 초오유를 한국 최초로 무산소 등정했다는 이유로 정부 포상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등정자라는 영예를 얻었다. 맑은 날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상에서 촬영한 사진에는 남쪽의 에베레스트가 보이지 않아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등정사실이 거짓이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그것은 히말라야 거봉 14개를 모두 등정한 것 이상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등정 조작에 얽힌 사건은 외국이 한 수 앞서 있다. 북미 최고봉 매킨리 초등정 조작극은 산의 이름마저 바꿀뻔한 사기였다. 1906년 미국 사람 프레드릭 쿡은 매킨리를 등정했다고 발표하면서 정상에서 찍은 가짜 사진을 증거로 내놓고 <대륙 꼭대기까지> 라는 제목의 등정기록을 책으로 냈다. 그러나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자 그는 유력 일간지에서 산의 원래 이름인 데날리(Denali)를 부정이라는 의미의 ‘디나이얼(Denial)산’으로 바꿔 부르자고 말했다. 대륙>
그 후 1913년 스턱과 카스턴스이 산을 초등하면서 쿡의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스턱은 쿡이 정상에서 찍었다는 사진이 매킨리의 한 낮은 봉우리였음을 공개했다. 초등 당시 스턱은 정상에 온도계를 놓고 왔는데 19년이 지난 1932년 매킨리의 정상에 오른 스트롬과 리크에 의해 회수된다.
일반적으로 정상 등정을 증명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가장 보편적이고 확실한 방법으로 정상 사진을 찍어 공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목격자가 등정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돈으로 사람을 매수할 수 있어 신뢰성이 없다. 셋째는 등정자가 정상에서 다른 사람이 놓고 온 증거물을 가져오거나 자신의 증거물을 놓고 오는 것이다. 이 방법은 후등자가 먼저 올라간 사람과 자신의 등정을 함께 입증할 수 있다. 정상에서 주워온 증거물로 인해 등정시비에서 해방된 역사적인 사건들은 상당수에 이른다.
1953년 낭가파르바트를 단독 초등한 헤르만 불은 세 번째 경우다. 그는 산 정상에서 티롤 깃발이 달린 피켈을 촬영했으나 정작 그것을 내버려둔 채 내려와 의혹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1999년 일본노동자연맹 원정대의 이케다 타케히도가 그 피켈을 발견함으로써 헤르만 불은 단독 초등정을 인정받는다. 헤르만 불은 낭가파르바트를 단독 초등정한 뒤 40여 시간에 걸쳐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당시 스물 아홉 살의 청년이었던 그의 몰골이 여든 살 노인으로 그것으로 변해있었다.
1972년 라인홀드 메스너는 동료 2명이 눈사태로 사망한 후 마나슬루 남면에 새로운 길을 뚫고 단독으로 정상을 등정했으나 사진을 찍을 수 없자 1956년 일본 원정대의 이마니시가 초등 당시 정상역층 바위에 박은 하켄 2개를 회수해 가져옴으로써 등정 사실을 인정받는다. 스잔춘(史占春)이 이끈 에베레스트 중국 원정대는 1975년 정상에 올랐지만 서구권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그들이 정상에 설치한 알루미늄 삼각가(三脚架)를 후일 다른 원정대가 목격한 뒤 등정 사실을 인정받는다. 메스너에 이어 8,000m급 14봉을 두 번째로 완등한 쿠쿠츠카도 한때 등정의혹에 휘말린 적이 있다.
1981년 그는 마칼루를 단독등정했으나 정상 사진이 없어 그 사실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네팔정부 연락장교가 “어떻게 그렇게 큰 산을 혼자 오를 수 있느냐”고 모함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이 일로 그는 네팔관광성에 불려갔는데 그곳에서 연락장교로부터 돈을 주고라도 화해할 것을 권고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는 결국 한국의 허영호가 이듬해 정상 바위틈에서 무당벌레 마스코트를 회수해 보고함으로써 의혹에서 풀려났다. 이 마스코트는 쿠쿠츠카가 1년 전 정상에 놓고 온 증거물이었던 것이다.
등정 조작은 등산의 성과주의가 낳은 부작용이다. 등산에서 정상에 오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과 남을 속이는 도덕성의 상실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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