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스토리는 인류가 만들어낸 꽤 영리한 발명품 중 하나다. 이 소망충족의 서사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기대를 주고, 비루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환상과 위안을 선사하며, 어리석은 실수와 질투를 속죄(어톤먼트ㆍatonement)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1935년의 여름. 영국 전원의 대저택에 살고 있는 귀족 처녀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가정부의 아들 로비(제임스 맥어보이) 사이에 터질 것 같은 긴장이 흐른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세실리아와 세실리아 가문의 후원으로 의학을 공부한 로비는 캠브리지 대학을 함께 다닌 친구.
하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관계 전환의 묘한 기류가 극작가 지망생인 세실리아의 어린 동생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난)에게 감지되면서 이들의 운명은 전쟁과 이별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영국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이안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어톤먼트> 는 무엇보다도 당대를 조명하는 우아하고 매혹적인 스타일이 일품이다. 어톤먼트>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작사로 입지를 굳힌 ‘워킹 타이틀’과 영화 <오만과 편견> 으로 문학의 영화화에 재능을 보인 조 라이트 감독이 다시 만난 이 영화의 장점은 격조의 미장센을 통해 영국 귀족층의 전원생활을 보여주는 전반부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오만과>
브라이오니가 뛰노는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 세실리아와 로비가 단 한번의 사랑을 나누는 저택의 서재, 상류사회의 격식이 억누르고 있는 만찬장의 흥분과 설렘 등이 브라이오니가 두드리는 타이프라이팅 소리에 맞춰 긴박하면서도 품격 있게 펼쳐진다.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을 보여주는 화법에 더해 화면을 넓게 장악하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활기차다.
크리스찬 디오르의 스타킹을 카메라 필터로 사용해 촬영한 전반부의 유려한 화면은 브라이오니의 오해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전쟁터로 끌려나가는 로비가 겪는 2차 세계대전의 장황할 정도로 기나긴 참혹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를 연상시키는 <어톤먼트> 는 그러나 오로지 결말을 위한 영화다. 액자구조의 이 영화에서 전쟁이 갈라놓은 사랑과 끝없는 기다림이라는 액자 내부는 아름답고 도도한 키이라 나이틀리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섬세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울 것이 없다. 어톤먼트> 잉글리쉬>
시점이 불러오는 오해와 그 오해가 빚는 파국, 허망하게 스러져가는 사랑의 안타까움은 액자의 프레임이 드러났을 때 비로소 보는 이의 심장을 움켜쥔다. 반전이라 불릴 이 영화의 결말은 실재와 허구 사이의 불화를 통해 또 하나의 애통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올해 골든글러브 감독상 및 음악상 수상작. 21일 개봉. 15세.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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