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라는 말 자체가 낯설던 때였다. 외국 문물을 일찍 접해왔던 내게도 골프는 낯선 운동이었다. 그때 나를 자극한 사람이 독립운동가 이순용씨였다. 미국통이던 이씨는 “미국인들은 휴가 때 일본에 가서 달러를 쓰고 온다. 골프장을 만들면 (미국인들을) 우리나라로 오게 할 수 있다”며 골프장 건설을 적극 추진했다. 앉아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거였다. 그래서 난 무조건 추진하기로 맘을 먹었다.
허나 한편으론 골프장 건설이 무모한 일 같아 보였다. 골프장을 짓는다 해도 수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 데 무슨 골프냐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을까 우려도 됐다. 그래도 추진력이 대단한 이순용씨 덕분에 용기를 얻어 골프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막상 골프장을 짓기로 하자 넓은 부지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다. 그때 이씨가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현재 어린이대공원 터인 군부대 자리가 골프장 건설 부지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이 곳에는 미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씨는 “72시간 안에 비워달라”고 요청했고, 미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땅을 비워줬다. 그렇게 미군 부대를 쫓아낸 자리에 골프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바로 지역주민과의 합의였다. 2년간의 갈등 끝에 골프장 잔디를 심고 팔각정(현 군자정)도 세웠다. 불가능할 것 같던 골프장 건설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은 골프장이 바로 우리나라 골프장의 효시인 ‘서울골프장’이었다.
골프장을 짓고 나자 당장 회원 모집이라는 난제가 다가왔다. 당시 5만원이던 골프장 회원권을 들고 유명인사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가입한 회원이 200여명이었지만, 골프장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나는 골프를 칠 줄 몰랐지만, 무작정 홍콩에 가서 골프채를 사왔다. 골프가 무슨 운동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당연히 무슨 채가 좋은지도 몰랐다. 무조건 홍콩에서 영국제 골프채 5~6벌을 들여와 가까운 친구들에게 주기도 했다. 나랑 친분이 두텁던 나익진씨는 라운딩을 하다 골프채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그만큼 골프는 우리에게 낯선 운동이었다.
서울골프장이 세계적으로 좋은 코스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미군이 ‘용산골프장’을 따로 건설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도 안양에 골프장을 지었다. 서울골프장을 시작으로 한국에도 골프장 건설 붐이 일었던 것이다.
나는 좋은 골프장을 지은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골프 선수를 키워서 이름을 알리는 게 필요했다.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연덕춘 선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골프에 자질을 보여 일본인 주선으로 일본에서 골프를 배우고 돌아온 프로였다. 나는 연 선수를 국제대회에 내보냈다. 입상은 못했지만 한국인 프로골퍼 연덕춘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골프를 즐겨 치던 멤버들이 오해를 사는 일도 있었다. 당시 원영덕 헌병사령관, 이재영 공보부 장관 등은 ‘족청’ 이범석씨 계열이라 자유당에서 꺼려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모이니 자연스레 곱지 않은 눈길이 쏠렸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택한 곳은 종로 삼정목에 있던 ‘안동장’이라는 중국집이었다. 낡은 중국집에서 모이니 의심하는 눈이 사라졌고, 우리는 편하게 골프 얘기를 나눴다.
안타깝게도 서울골프장의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신정권 때 박정희 대통령의 선거공약이 바로 서울골프장을 없애고, 그 자리에 어린이대공원을 만드는 거였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코스였던 서울골프장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서울골프장은 어린이대공원 조성을 위해 서울시에 기증됐고, 현재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한양컨트리클럽이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우여곡절 많았던 골프장 건설 사업은 무역인이던 내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만큼 애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해냈다. 아흔을 바라보는 내가 지금까지 초심으로 골프를 즐기는 이유기도 하다. 나는 다시 본업인 무역으로 돌아와야 했고, 드디어 내 이름의 대명사인 삼화제지 사업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삼화제지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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