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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기억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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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기억의 재구성

입력
2008.02.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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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읽은 책의 내용이 흐릿할 때가 있다. 무지개로 치자면, 어렴풋이 붉은색 계열인지, 푸른색 계열인지는 떠오르지만 정확히 초록이었는지 파랑이었는지는 아리송하다. 꼭 책을 읽을 때만도 아니다.

요긴할 때 쓰려고 비상금을 몰래 감추어 두었는데, 정작 필요할 때는 어디에 감추었는지는 물론이고, 비상금을 따로 떼어 놓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게 마련이고, 꼭 기억해야 할 일도 아니라고 넘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한창 공부에 매달려야 할 나이라면, 걱정은 커진다. 기억이 모든 학습의 기본 조건인 때문이다.

■뇌신경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뇌세포가 외부의 자극을 어떻게 전달받고, 저장하고, 꺼내어 쓰는지에 대한 대강의 과정은 드러났다. 또 뇌세포의 활동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대사물질도 많이 규명됐다.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떤 기억을 떠맡는지도 높은 확률로 추정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어떤 전기화학 신호가 실제로 어떤 내용과 대응하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공상과학 영화에 자주 등장하듯 특정 기억을 지우거나 바꾸고, 모든 학생들의 희망처럼 애써 공부하지 않아도 단번에 대량의 지식을 얻는 일은 아득한 꿈의 영역에 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강봉균 교수 연구팀이 기억 재생에는 뇌신경세포 시냅스의 단백질 분해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뇌신경과학자들은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 즉 기억의 입구를 어느 정도 밝혔다.

외부 자극이 뇌신경세포에 전달되면 신경세포 시냅스(돌기)들이 단단하게 결합하는 '강화'가 일어나며, 시냅스 사이의 단백질 합성이 그 본질이라는 점 등이다.

강 교수 팀은 그렇게 저장된 기억이 거꾸로 시냅스 사이의 단백질 분해를 통해 튀어나오는 과정을 확인했다. 기억의 출구로 가는 실마리라는 점에서 꿈의 출입구의 전모가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기 시작한 셈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뇌가 컴퓨터처럼 한번 입력해 두면 언제고 찾아 쓸 수 있는 무한 기억력을 갖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 듯하다. 당장 기억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적시에 꺼내 쓰는 데 불가결한 기억의 분류표가 점점 복잡해지고, 나중에는 검색에만도 적잖은 애를 써야 한다.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하지만 자칫하다간 쓰레기 더미에 빠진 꼴이 되어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정신을 집중해서 읽고, 쓰고, 말하고, 들어서 시냅스를 굳히고, 자주 꺼내 써서 '검색의 대로'를 확보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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