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 문학과지성사대체역사소설의 충격 "역사는 고쳐 씌어진다"
1940년 2월 11일 일제의 강압에 의한 조선인의 창씨개명이 시작됐다. 이듬해 말까지 전체 호수의 81.5%가 이름을 일본 식으로 바꿨다.
끝까지 거부해 자결한 이들도 있었고, '山川草木(산천초목)' '靑山白水(청산백수)' 혹은 스스로 '개자식'이라며 '犬子(견자)'라는 이름을 지어 일제를 조롱한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깊이깊이 나의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생각한 끝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했다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개명한 이광수(李光洙) 같은 이들도 있었다.
복거일(62)의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 (1987)의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는 자신의 이름이 일본식 이름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인물이다. 비명(碑銘)을>
이 소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에서 죽지 않고 16년을 더 살아남아 일본 내 군국주의 세력을 억제, 일본이 세계의 지도적 국가로 큰 번영을 누리면서 한반도를 계속 지배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른바 '대체 역사 소설'이다. 쇼우와 62년, 서기 1987년의 조선은 완전히 일본에 동화돼 조선어도 사라졌고 조선인들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외국인회사 간부로 시인을 꿈꾸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기노시다도 비록 내지인 아닌 반도인이라는 차별을 가끔 의식하지만 그럴수록 완벽한 황국 신민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의 삶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창씨개명 이전 자신의 성이 기노시다가 아닌 박(朴)씨였다는 것, 조선어로 쓰인 <조선 고시가선> 이란 책이 있었다는 것 등을 알게 되면서다. 종장에 그는 "내가 나일 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망명객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상하이 임시정부로 길을 떠난다. 조선>
역사와 현실과 미래에 관한 놀라운 상상력이 번득이는 소설이다. 그런데 작가 복거일은 이 작품으로 한국문학에 충격을 준 10여년 후에는, 영어공용화론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런 것이 시간의 아이러니일까.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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