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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 13세 소년 피끓게 한 4·19 20년 후 5·18로 다시 피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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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 13세 소년 피끓게 한 4·19 20년 후 5·18로 다시 피끓다

입력
2008.02.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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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19일 새벽.

그날도 이불 속엔 나 혼자였다. 통금 해제 사이렌소리와 함께 라디오를 켰다. 첫 뉴스를 알리는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동요가 매우 심각하다는 내용이었다. 조간신문을 펼쳤다. 국가비상사태가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었고 전국 학교의 휴교령도 언급되었다.

나는 급히 일어나 학교로 달려갔다. 새벽 길은 고요했다. 한 구부정한 청소부 아저씨가 비로 쓸며 검붉은 여명의 도시 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차량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적막한 광화문 사거리. 옅은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도시가 죽은 듯하였다.

학교 철문이 굳게 잠겨 있어 담을 넘었다. 중학교 2학년 7반 내 자리에 앉았다. 오전 9시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교실 문을 열고 복도를 따라 교무실 쪽으로 가 보았다. 텅 빈 교무실. 텅 빈 운동장. 멀리 내려다보이는 비원에서 아름다운 새소리만 들려왔다.

밖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학교 담장 개구멍으로 몸을 빼어 집으로 향했다. 텅 빈 거리, 갑자기 멀리 안국동 로터리 쪽에서 요란하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명의 대학생들이 빠르게 반공연맹청사(현 미국대사관 뒤) 쪽으로 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달렸다. 반공연맹청사 주변을 수십 명의 대학생들이 돌멩이를 들고 접근하고 있었다.

그때 한방의 총성 "탕!!". 학생들이 광화문 길로 급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뛰었다. 계속되는 총성 "타-당!!" "타-당!!". 그때 그 한방의 총성이 역사에 기록된 '경찰이 4ㆍ19 학생시위대에 첫 발포한 총격'이다.

나는 계속되는 총격을 피해 현재의 미 대사관 건너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쪽 가로수 뒤로 몸을 숨겼다. 순간 내 얼굴 위로 퍽- 하며 한 물체가 떨어졌다. 하얀 교복 차림의 경기여고 학생이었다.

흰 교복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나는 미친 듯이 그녀를 흔들었다. 의식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등에 업고 마주 보이는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은 잠겨있었다. 사람 살려 달라고 외쳐댔지만 대답이 없었다. 유리문을 부수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의사와 간호사는 피투성이의 우리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들에게 여고생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이미 생명이 끊어진 후였다. 그녀는 죽었다. 왜?

의사와 간호사는 나에게 그녀를 빨리 데리고 나가라고 소리치며 문을 닫아걸었다. 광화문 일대가 시체와 총격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시위대들은 경무대(청와대)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광화문 소방서 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시위대들이 몰고 가는 소방차 뒤에 올라탔다. 중앙청 쪽에서 총탄이 빗발쳤다. 운전석의 학생이 총탄에 맞고 소방차는 전복이 되었다.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였던 이기붕 당시 국회부의장 집에 불을 지르고 이승만 일당들을 죽이겠다고 미친 듯이 외쳤다. 그러나 나는 그 여고생의 억울한 죽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나는 홀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때, 내 나이 열세살.

그 날 밤 나는 혼자서 많이 울었다. 다음 날 새벽 조간신문. 1면 '경찰, 학생 데모대에 발포!' 제하에 길종형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총탄이 쏟아지는 청와대를 향해 하수도관을 밀고 가는 한 대학생' 길종 형이었다. 식구들이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기뻤다. 내게 위대한 형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그 길로 형을 찾아 나섰다. 거리에는 자유를 찾으려는 인파가 노도와 같았다.

나는 캠퍼스로, 무교동으로…그를 찾아, 묻고…또 묻고, 달렸다. 마침내 다 허물어져가는 주막 구석에서 술에 취한 형을 찾았다. 우리 둘은 승리의 환호를 외치며 부둥켜안았다. 그 날 난생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형이 밤새 주는 막걸리에 취해 나는 그 다음날 낮까지 흠뻑 잤다. 그리고…세월이 한참 지나 나는 이 기억과 다시 만난다.

1980년 5월 18일. 남산 중턱에서 영화 <최후의 증인> 을 촬영할 때였다. 최불암씨와 정윤희씨가 갑자기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려 NG를 계속 내었다. 제작부가 경찰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며 촬영을 중단시켰다.

잠시 후 최루탄 연기와 함께 한 떼의 인파가 남산 길로 올라왔다. 대학생들이었다.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쉴새 없이 기침을 뱉었다. 음료수 장사 아줌마들은 바쁘게 학생들에게 콜라를 주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물었다. "데모대예요. 광주로 열차를 타고 가려는데 못 가나 봐요." "…한 학생도 돈 안 내고 음료수를 가져가는 학생이 없어요.

세상 참 많이 바뀌었는데…아직도 독재를 하니…쯧쯧…" 아줌마의 그 넋두리가 내 마음을 스쳤다. 20년 전, 13세 소년 하명중.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시체를 등에 업고, 소방차에 몸을 싣고, 깃발을 들고 외치며 달리던…나.

20년이 지나 또 다른 독재자가 수많은 국민을 총칼로 죽이는 것을 나는 멀리 남산 중턱에 서서 목격하고 있었다. 1985년, 전두환이 권력에 미쳐 발광할 때 나는 그를 전복시킬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 작품이 천승세의 소설 <낙월도> 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 <태> 다. 그 비화는 후에 공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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