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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도시 공사 한창… 연기군 갈운마을의 '마지막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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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도시 공사 한창… 연기군 갈운마을의 '마지막 설'

입력
2008.02.09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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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부모님 산소를 새 자리로 옮겨드렸으니, 우리도 이제 가야지.”

9일 충남 연기군 남면 갈운리. 태어나 단 한번도 떠난적이 없었던 고향을 영원히 등져야 할 임길수(70)씨의 눈가 주름이 한층 깊이 패는 듯 했다. 몇 개월만 지나면 추억으로 더듬을 수 밖에 없는, 그 살가운 풍경을 둘러 보는 표정은 웬지 쓸쓸했다. 갈운리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행정타운 배후 주거단지가 들어설 곳이다. 예정대로라면 임씨는 6월까지 짐을 싸 마을을 떠나야 한다.

“아쉽지. 난 충북 청원군 옥산면으로 가. 두메산골이야. 여기서도 한 평생 농사를 지었으니 가서도 농사지 뭐. 소 8마리 계속 먹이고, 논 12마지기 임대 받아 짓던 거 6월까지 모는 심어놓고 가야지. 나라에서 그 안에 나가라면 나갈지도 몰라. 어차피 다 팔아먹은 거 이제 내 게 아니니까.” 임씨는 한숨 지었다.

올 설은 이웃과 친지들이 떠난 뒤 처음 맞는 설이자 고향에서의 마지막 설이다. 임씨는 텅 비어 가는 마을처럼 마음이 휑하다 했다. “우리 마을 50가구 중에서 7가구만 남았어. 이젠 설 장 볼 곳도 없어서 조치원까지 나가야 해. 다 갔지. 이제 다 빠져 나갔어…. 이거 원 이젠 술 한 잔 할 곳이 없어. 종촌리 같은 데 봐. 마을이 싹 망가졌으니…. 날마다 때려부수고 난리야.”

갈운리 등 연기군 남면 일대는 2006년 보상이 마무리되자 일찌감치 짐을 챙겨 떠나버린 주민들로 황량했다. 지난해 7월부터 중앙행정타운 공사가 시작된 마을 입구 쪽 종촌리는 굴삭기와 덤프트럭의 요란한 굉음 소리가 난무했다. ‘개발’과 ‘발전’의 위용을 뽐내려는 태세였다. 붉은 속살을 훤히 드러낸 황무지 사이로 미처 부수지 못한 콘크리트 철골더미만 앙상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임씨는 온 마을 잔칫날이었던 설 얘기를 꺼냈다. 연기군은 400여년 전부터 부안(扶安) 임(林)씨가 집성촌을 이뤄 주변이 온통 일가 친척들이었다. “다 친척들이니까, 설 세배하러 다니고 어른들은 다 찾아 뵀지. 그때가 좋았어. 좋은 게 뭐냐 하면, 세배를 가면 말이야 술이 안 떨어져. 세배 오면 술 한잔씩 주시고, 세배 끝나면 풍물도 치고. 우리 형제가 9명인데, 나도 윗사람 아랫사람 세배 하고 받고 그러면 꼬박 이틀이 걸렸는데….”

동네 사람들과의 끈끈한 나눔도 이젠 돌아올 수 없는 옛 얘기가 됐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풍물 치고 돌아다니고, 집마다 쌀을 내놓고, 상쇠(풍물패의 우두머리)가 촛불 켜고 축원하고. 나도 함께 다녔는데, 쌀은 동네 자금으로 쓰는 거야. 집마다 형편대로 부잣집은 한 말, 보통은 닷 되씩 냈어. 정말 어려운 집은 돈을 조금 내고.” 옆에서 아내인 박준선(70) 할머니가 타박한다. “그런 얘기를 뭐 하러 하누. 다 지난 얘기를.”

임씨는 언젠가 고향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우선 옮겼다가 다시 온다는 기대 밖에 없어. 그것마저 없으면 절망이지. 그런데 내가 지금 칠십인데 내 평생에 되려나. 일이십년 안에 오겠나….”

양화리에서 만난 임영수(63)씨는 “버티겠다”고 했다. 공사 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소송 중이다. 학이 내려 앉은 모양이라는 양화리는 600년 된 은행나무 등이 있어 민속보존마을로 개발이 유예됐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돈을 쥐어 들고 고향을 떠났다. “몇 몇이 법정 투쟁한다고 되겠어. 그래도 할 수 있는데 까지 해 봐야지.”

임씨에게 고향은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는 곳이다.“천만금을 주고 이런 고향을 살까. 아늑하고 강을 끼고 이렇게 좋은 곳이 없어. 억울하지. 우리들이 잘했으면 선대 할아버지들이 물려주신 고향을 지킬 수 있었는데, 후손들이 못나서…. 난 부모님 산소를 끝까지 여기 모실 거야. 부모님이 객지로 나가지 않게 하루라도 더 고향에, 종산에 계시게 할 거야.”

연기=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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