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 88체육관. 민주노총 정기 대의원 대회의 개회를 선언한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의 간곡한 목소리가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여러분 오늘은 제발 대회가 끝날 때까지 꼭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같은 달 9일 열린 중앙위원회가 회의 도중 성원 미달로 유회된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집행부는 내외빈 축사도 생략하는 등 대회를 빠르게 진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대회장을 빠져나가는 조합원들이 줄을 이었고, 대회는 6개 안건 중 첫번째 안건인 재정혁신 방안 하나만 통과시키고 6시간 만에 정족수 부족으로 유회되고 말았다.
잇단 유회 사태에 대해 민주노총 간부들의 비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부영 민노총 울산지역본부장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여망을 안은 민주노동당이 대선 이후 내홍을 겪으며 공중분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민주노총마저 또 다시 대회 유회라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하게 됐다”고 탄식했다. 그는 “민생은 뒷전이고 날마다 쌈박질만 하는 국회를 ‘썩어빠졌다’고 비난을 퍼붓던 민주노총이 역설적으로 그걸 배우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국노총과 함께 노동계의 양대 축을 형성하는 민주노총이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민주노총은 1995년 창립 이후 사회 민주화와 개혁에 앞장선 대표적 진보 노동단체다. 그러나 최근 과격 투쟁과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면서 활동이나 위상이 위축됐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이 구태를 벗고 시대에 맞게 조직과 위상을 재정립해 건전한 진보 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민주노총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민노당 위상 추락에 따른 정치적 영향력 감소다. 민주노총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민노당은 대선 참패 후 계파간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당 위기에 몰려 있다. 심상정 의원 등 평등파가 민노당의 친북ㆍ종북(從北) 이미지를 없애려 했지만, 다수 세력인 자주파가 이를 막으면서 분열을 재촉했다.
이 과정에서 민노당 내 상당 지분을 갖고 있는 민주노총은 평등파의 당 혁신안을 거부하고 자주파의 손을 들어줬다. 지금 상황이라면 쇄신을 거부한 민노당이 4월 총선에서 민심을 회복해 선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민노당이 군소정당으로 추락한다는 것은 더 이상 국회에서 민주노총의 목소리를 대변할 세력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간담회 무산과 대규모 투쟁본부 설치 등으로 불거진 민주노총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의 불편한 관계는 일촉즉발의 긴장감마저 감돈다. 양측간 형성된 한랭전선이 지속될 경우, 차기 정부는 정책연대를 맺은 한국노총과의 밀월을 즐기며 민주노총을 의도적으로 배척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민주노총은 ‘투쟁만 하는 노동계의 외딴 섬’으로 전락하게 되고, 노동판의 무게 중심이 한국노총 쪽으로 급격히 이동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민주노총 내부의 응집력 약화도 골칫거리다. 최근 몇 년 사이 대의원대회 무산과 유회는 ‘전통’으로 굳어졌다. 성원 부족으로 시작조차 못하는가 하면, 가까스로 대회가 진행돼도 회의 도중 조합원 이탈로 유회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해가 바뀌어도 조합원들의 무관심과 계파간 갈등이라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여전히 민주노총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올해부터 철도 등 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해 시행되는 필수유지업무제도(파업 때 최소 업무 유지)는 민주노총의 올 최대 사업인 공공부문 투쟁에 큰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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