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만족 NO, 오너 만족 OK!" 언제부턴가 언론계에 떠도는 말이다. 독자들에게 좋은 기사를 전하려고 애를 써봤자, 오너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만 못하다는 간지(奸智)가 담겼다.
실제로 어느 신문사의 잘 나가던 선배가 유럽 근무 시절 출장 온 오너를 '폼 나게' 모시지 못한 죄로 옆길로 밀려난 일도 있다. 독자는 금세 잊지만 오너는 평생 잊지 않는다는 말도 같은 뜻일 게다.
■ 무성해지는 증거인멸 의혹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특검의 삼성 비자금 수사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조직적 증거인멸 의혹 때문이다. 삼성화재 본사 압수수색 당시 비자금을 보관하는 비밀금고가 있었다고 제보된 자리에는 새로 벽을 만들어 메운 공사 흔적이 역력했다. 단서가 될 만한 문서나 컴퓨터 파일도 대부분 폐기되거나 삭제된 모양이다.
특검이 압수ㆍ수색에 착수하기 훨씬 전에 이미 삼성 각 계열사에는 임직원 개개인의 업무자료까지 별도 서버로 옮기고, 삭제하라는 지침이 내려간 만큼 특검의 압수ㆍ수색 자체가 형식절차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돌았다.
특검은 비자금 수사, 즉 업무상 배임ㆍ횡령 혐의 수사에 덧붙여 조직적 증거인멸 혐의도 수사하고 있다지만 구체적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증거인멸죄는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 관련 증거를 인멸ㆍ은닉ㆍ위조ㆍ변조하거나 위ㆍ변조한 증거를 사용할 경우에 적용된다. 없애거나 감춘 자료가 '관련 증거'여야 하는데 '사라진 자료'가 그런 것이라고 특정하기란 쉽지 않다.
또 증거인멸 지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도 지시를 내린 사람들은 업무상 배임ㆍ횡령의 당사자일 가능성이 커서 '타인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교사죄 적용에 그친다.
더욱이 증거인멸죄의 처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이어서, 업무상 배임ㆍ횡령이 입증될 경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받게 될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꼭 '조직의 삼성'이 아니더라도 증거인멸 의욕을 느낄 만하고, 그에 따라 수사는 앞으로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전망이다.
그러나 삼성 사람들이 수사 난항에 안도하거나, 거꾸로 수사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낼 일은 아니다. 오히려 특검 수사를 부른 해묵은 관행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고, 어떻게 그런 관행을 털고 새로운 삼성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를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삼성은 물론이고 삼성이 이 나라에 있다는 사실에 은근한 기쁨을 느껴온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 전체 임직원의 의식 전환이고, 그 핵심은 오너의 만족을 위한 '오너 충성'을 고객과 주주, 회사에 대한 충성으로 대체해 나가는 것이다. 비단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국내기업이 안고 있는 과제다. 한국기업은 고객과 주주, 회사조직 자체보다 오너 겸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충성과 열의에 불타는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
■ 강요된 허위의식 깨뜨려야
한국기업 오너들의 과욕, 특히 경영권에 대한 유난한 집착이 근본 요인이다. 그만큼 한국기업의 경영권 혜택은 크다.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고, 개인생활과 사회활동에 필요한 모든 경비, 개인의 명예를 높이는 거액의 기부까지도 회사가 부담해 준다.
주식 배당금이나 개인자산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씀씀이다. 그런 혜택을 피붙이에게도 이어주려면 변칙 상속ㆍ증여 욕구가 절실해지게 마련이다.
이런 오너의 아집을 기업조직이 지탱해 준다. 오너와 이해를 같이하는 일부 고위 임원들의 자세야 이해할 수 있지만, 일반직원들의 그런 태도는 강요된 허위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IMF 위기 이후 많은 기업의 주인이 바뀌었어도 개별 기업은 씩씩하게 살아난 경험을 토대로 아래에서부터 '회사충성 OK, 오너충성 NO!'라는 외침이 터져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유력한 수단인 주주대표소송이 기업규모가 클수록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것만이 한국 기업문화를 바로잡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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