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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파도리 주민들의 착잡한 설맞이/ "작년엔 굴·전복 캐서 손주 세뱃돈도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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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파도리 주민들의 착잡한 설맞이/ "작년엔 굴·전복 캐서 손주 세뱃돈도 줬는데…"

입력
2008.02.0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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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이랑 전복 따서 손주 세뱃돈이라도 쥐어 줄 생각이었는데…”

설을 사흘 앞둔 4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에서 만난 권영신(72ㆍ여) 할머니는 대화 도중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두 달 전 터진 태안 앞바다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사고로 이젠 바다에 나가서 할 수 있는 벌이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예전엔 조세(나무 자루에 쇠꼬챙이를 박아 굴 따는데 쓰는 도구)와 망태기 하나만 있으면 하루에 굴을 4, 5㎏씩 따 3, 4만원은 족히 벌었다.

지금은 망태기 대신 고무장갑을 들고 바다로 나가, 굴 대신 시커메진 기름헝겊을 안고 들어 온다. 매서운 겨울 바람을 온종일 맞아가며 검은 바위를 닦고, 또 닦다 보니 몸도 성할 리 없다. 오다가다 바위에 미끄러지면서 정강이엔 타박상이 생겼고, 기름의 독성 탓인지 인중에 퍼런 염증이 생겼다가 지금은 딱지가 내려 앉았다. 권 할머니는 “나뿐만 아니라 동네 할매들 다 죽게 생겼다”고 말했다.

설은 코앞으로 다가 왔지만 마을 분위기는 예년에 비해 확연히 못하다. 연휴 직전인 5일에도 기름 제거 작업에 나서야 했다. 그나마 4일부터 생계지원비가 들어 오기 시작해 ‘차례상이라도 차려 조상 뵐 면목은 섰다’고 위안하는 상황이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예전의 파도리를 떠올리면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파도리는 ‘길쭉한 섬’ 모양의 육지로 마을을 둘러싼 3면의 바다에는 전복 미역 우럭 굴 등이 차고 넘쳤다.

특히 설 전인 이맘때엔 전복이 본격적으로 잡히기 시작해 수십 가구씩 매달려도 손이 모자랄 정도였다. 주민 이병주(54)씨는 “사고 전까지만 해도 ‘파도리에선 굶지는 않는다’는 말이 당연하게 들렸고 미역을 길러 수 억원을 번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파도리 바닷가에서 칠십 평생 미역을 따고 굴을 캐며 살아 온 권 할머니에게 기름 사고는 가혹한 형벌이다.

하지만 살려고 마음 먹으면 또 살아지는 게 인생. 주변의 도움으로 권 할머니는 조금씩 희망을 찾아가고 있다. 이날 찾아간 권 할머니의 집 안엔 20㎏ 쌀 두 포대와 한과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웃이 갖다 놓은 것인데 저것들을 받고 펑펑 울었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엔 또 눈물이 고였다. 이웃에 대한 고마움, 주변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권 할머니는 “매일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작업을 하고 최소한 점심 한끼는 함께 하니 끼니 빼 먹는 일은 줄었다”며 웃었다.

맨 처음 우왕좌왕하던 기름 제거 작업도 어느덧 자원봉사자들의 도움과 마을 사람들의 협동작전으로 체계를 잡아 갔다. 기름으로 새까맣던 파도와 갯바위들도 대부분 예전 색깔을 되찾았다. 정차영(58) 파도2리 이장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부터 많은 용기를 얻었다”면서 “마을 사람끼리 더욱 합심해 보상 문제 등도 슬기롭게 해결하고 소외된 이웃도 다시 한번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설은 할머니의 얼굴에도 웃음을 피우고 있다.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자식들과 토끼 같은 손주들 얼굴을 볼 기대 때문이다. 방에 온기라곤 전혀 없어 “기름이 없느냐”고 묻자 권 할머니는 “정부로부터 받은 게 좀 있는데 6일부터 때려고 아껴 뒀다”고 말했다. 6일은 외지에서 아들 내외와 손주들이 설을 쇠러 내려 오는 날이다.

태안=박원기 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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