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역협회는 일제시대 적산가옥과 비슷했던 미도파 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실은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낡은 사무실에 책상 몇 개 달랑 놓인 게 전부였다. 이처럼 겉모습은 초라했으나, 내실 마저 부실했던 것은 아니다. 삼화화섬을 운영하면서 금융통화위원을 했기 때문에 단체를 꾸려가는 일이 낯설진 않았다. 자신감 만큼은 넘쳐 났다.
화신의 박흥식과 주요한, 오정수, 천우사의 전택보 등이 초기 창립 멤버였다. 우리는 밤낮으로 뛰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민은 협회를 꾸려갈 자금을 어디서 충당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때 아이디어로 떠오른 것이 무역기금이다. 당시 정부는 무역기금을 상업은행에 예탁했는데, 이 예치금 이자를 잘만 하면 협회 자금으로 끌어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씨에게 달려가 예치금의 이자를 무역기금으로 쓸 수 없겠냐고 읍소했다. ‘수출만이 살 길’이던 때였기 때문에 김정렴씨도 흔쾌히 허락했다.
나는 조성된 무역기금으로 순조롭게 협회를 꾸려가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번듯한 건물도 하나 사서 무역협회가 활성화하길 바랐다. 당시 서울 회현동 빌딩(현 LG CNS빌딩ㆍ730평 규모)이 평당 35만원이었다. 나와 함께 협회 일을 하던 박흥식, 주요한, 전택보 등에게 이 건물을 사자고 제안했고, 몇 번의 신중한 회의를 거쳐 구입을 결정했다. 번듯한 무역회관이 생긴 셈이다. 그 때가 1974년이었다. 우리는 건물만 봐도 배가 불렀을 정도로 뿌듯했다.
6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민간무역 규모는 1인당 200달러 수준이었다. 대만이 1억달러 수출 기록을 올리던 때였기 때문에 우리 무역 규모는 그야말로 초라했다. 무역 규모를 늘리면 자연스레 무역기금이 더 많이 조성되고 이자도 불어나 협회가 번창하는 선순환이 가능했다. 국가적으로 수출에 목숨을 걸던 때라 수출 규모는 어느새 1,000만달러를 훌쩍 넘겼다. 협회도 지속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고, 홍콩에 있는 코리아센터 건물을 구입하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매년 불어난 이자 수익으로 지금의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를 건립하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평당 2만~3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협회 이사였던 남양수산 이종국씨가 센터 건립에 큰 공을 세웠다.
협회 일은 일종의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이권 다툼도 없었고 다들 온화하고 깨끗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라 책상 몇 개로 시작된 협회는 나날이 성장해갔다. 현 무역협회가 국내 경제단체 중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 데는 이 같은 선배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무역협회가 회비에 의존하는 가난한 단체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협회 운영이 마냥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이활씨가 회장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공부 한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비즈니스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무역협회에 첫 발을 내디딘 나익진씨와 자주 충돌이 생겼다. 동아무역을 설립했던 나익진씨는 공적인 협회 일보다는 사적인 사업가 기질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협회는 공적인 일을 하는 곳이었던 만큼 개인 사업과 연결하는 일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나익진과 친분이 두터웠던 나는 “내 사업과 협회 이익을 연결해본 적이 없다. 부조리와 결탁하는 건 절대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협회 임원들과 회의를 통해 이활 회장과 나익진씨와의 가벼운 충돌을 조율하기도 했다. 금통위 위원으로 3년을 지낸 경험이 있던 내가 깨달은 건 단체 내에서 바른 말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얻은 별명은 ‘독설가’였다.
협회 일을 하면서 독설가로 통했던 나는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한국 무역 발전을 위해 일을 했다는 사명감에 뿌듯했다. 특히 무역업을 하던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 이들과 뜻을 모아 한국 무역 발전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됐다. 소박하게 출발했던 협회는 어느새 크게 성장해 정상 궤도에 올랐고 나는 또 다른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 때 운명처럼 다가온 일이 바로 골프장 건설이었다. 골프가 뭔지도 모르고 골프채 한 번 구경하지 못했던 내게 한국에서의 골프장 건설 사업은 매력적인 일로 다가왔다. 골프를 어떻게 하는지도 전혀 모르던 시절에 골프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그래서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새 사업을 시작한다는 설렘이 다시 나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삼화제지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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