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극단 76단’ 기국서의 ‘햄릿 시리즈’는 군사정권 아래 횡행한 폭력과 학살의 야만성에 맞서 지식인의 저항의식을 보여준 대표작이었다. 연극이 정치적 의식과 사회적 발언력을 잃고 협애해진 이 시대 ‘햄릿’은 다시 연극의 사회를 향한 발언이자 연극행위를 하는 이들의 존재 선언이 될 수 있겠는가?
하필 ‘햄릿’이 그 사명과 계기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질문에 연극행위의 본질적 고민의 시작과 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가면을 쓰고 살 것인가, 맨 얼굴로 살아갈 것인가’하는 의미로 바꿔볼 수 있다.
연극과 배우의 운명이 역할의 가면을 씀으로써 사회의 가면을 벗기고 인간성과 권력 도처의 기만과 위장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한 극단이 ‘햄릿’을 선택한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 연극행위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에 맞닿게 된다.
‘극단 76단’ 출신이자 연출가 기국서의 후배로서 연극하는 정치의식과 청년정신을 상속받은 박근형은 이번 공연에서 분명히 이를 의식한다.
그냥 ‘햄릿’이 아니라 <골목길 햄릿> 이라 한 것은 반기성문화의 기치를 걸고 극단 특유의 남루한 외형으로 셰익스피어를 소화할 것임을 커밍아웃하고 있는 셈이다. 골목길>
화려한 의상과 스펙터클의 눈요기가 그야말로 극성의 핵심이 되는, ‘코스튬 플레이’ 속성을 가진 정통고전극 햄릿을 박근형은 저자거리 말로 ‘딸랑 이거?’라 할 만큼 최소한의 물량으로 상연해간다.
대관식 왕좌와 침상으로 사용되는 다섯 개의 상자형 나무의자, 햄릿의 고뇌와 독백공간으로 쓰이는 한 개의 의자만으로 극은 공연된다. 의상은 평상복에 가깝고 국상기간이므로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정도다.
공간을 깁고 후리는 연희성, 희극성과 비극성에 엇박을 놓는 리듬감 등 극단 골목길 연극에 기대되는 요소들이 슬며시 담겨 있다.
그 나이쯤 되면 남성호르몬이 줄어 중성화되는지 여배우가 맡아도 자연스런 폴로니어스 역 해석이 눈에 띄고, 햄릿에 대한 연민과 자기불행으로 부서진 오필리어의 소네트를 우리 정서와 말법으로 다듬은 장면이 순연하다.
인간성의 윤리적 파괴상을 고발하고 한 사회의 오염도를 측정하며, 연극정신을 다짐하고 가난을 영성체처럼 받아들이던 광대 정신은 이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어떤 연극인들은 무자년 시궁쥐의 운명처럼 지하에서 ‘권력이야말로 시대의 종양이지(햄릿)’를 읊으면서 ‘악취 나는 세상’에 대한 예각을 벼리고 있을 것이다.
연극과 배우의 존재조건을 화두로 틀어쥔 이번 <골목길 햄릿> 은 극단 신진 대부분으로 채워진, 설익었으나 충만한 연극정신을 다짐하는 자리다. 2월 17일까지 게릴라 극장. 골목길>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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