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등급제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알고 있지만 처음 예고된 것은 10년 전인 1998년이다. 당시 교육개혁을 위한 대통령 자문기구에서 점수 1~2점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폐단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수능등급제안을 제시했고 3년 후 먼저 점수제와 병행해 시행했다. 그러다 2004년 교육혁신위원회가 이를 발전시켜 2008학년도 입시부터 점수제를 없애고 등급제만 시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지금은 상가집 개 신세가 됐지만 교수와 교사, 연구기관, 시민단체 등 교육관련자 수십 명이 적어도 수개월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안이다. 시안 발표 후에는 전국을 돌며 여러 차례의 공청회를 열었으나 큰 논란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나름대로 필요한 절차를 충분히 거친 셈이다.
수능등급제 연원을 장황히 설명한 것은 이 제도를 옹호하자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고민해 만든 입시안도 막상 시행에 들어가자 예기치 못한 혼란과 역풍에 부딪칠 만큼 우리나라에서 교육, 특히 대입제도는 뜨거운 감자라는 것을 일깨우고 싶은 것이다.
인수위가 쏟아내는 교육정책 개선안을 보면 우려와 걱정이 앞선다. 올해 수능등급제 보완을 시작으로 2012년도에는 수능 과목을 최대 8개에서 5개로 축소하고 2013학년도에는 수능에서 영어과목을 없애는 대신 영어능력평가시험을 도입한단다.
그야말로 하나하나가 초ㆍ중ㆍ고교생과 학부모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들이다. 여기에 영어몰입교육, 영어수업시간 확대, 교사 증원 등 숨돌릴 새도 없다.
이런 굵직굵직한 정책이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나왔다는 게 놀랍다. 과거 같으면 6개월에서 1년 가량 지지고 볶고 해서야 겨우 만들어졌던 것들이다. 인수위원장은 "교육분과 위원들이 10년 넘게 구상해온 것"이라며 즉흥적인 정책이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말장난일 뿐이다.
발표된 교육정책을 만들 사람들이 누군가를 보면 의구심은 커진다. 인수위 교육 담당자는 인수위원과 전문위원, 자문위원을 합쳐도 10여명에 불과하다. 아무리 교육의 전문가들이라고 해도 이 정도 인원이 번개불에 콩 구어 먹듯 만든 입시제도를 제대로 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것도 거개가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들로 현장 교사나 교장은 한 명도 없으니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됐을리 만무하다. 수능 과목을 축소했을 경우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영어평가시험 도입이 사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면밀히 따져봤는지 의문이다.
이전 어느 정부도 인수위에서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듯 뚝딱 교육정책을 내놓지는 않았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정부 출범 후 위원회를 구성해 장기간 의견수렴과 깊은 논의를 거쳤다.
교육이 안고있는 문제점을 단박에 뿌리뽑겠다는 한탕주의 발상은 극히 위험하다.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그 것은 불가능하다. 김영삼 정부가 1995년 교육개혁위원회를 만들어 내놓은 5ㆍ31교육개혁안을 이념과 정체성이 전혀 다른 김대중 정부가 고스란히 물려 받았던 것은 교육의 일관성이 그 만큼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반대여론이 불거지자 "청계천도 처음에 반대했지만 하고 나니 모두들 좋아하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인수위는 교육정책에서 손을 떼고 새 정부 출범 후 차분하게 논의를 해야 한다. 교육은 청계천 복원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왜 모르는지 딱하다.
이충재 부국장 겸 문화부장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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