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한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1668~1715),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했던 조영석(1686~1761), 실제 생활을 관찰하고 묘사했던 김홍도(1745~? )….
기존 미술사에서는 이들로 대표되는 18세기 화가들을 서양미술의 사실주의 원리를 수용한 근대적 화가로 평가해왔다. 이는 멀리 <한국미술사> 의 저자 고 안휘준 서울대교수나 고 최순우 국립박물관장 등 한국미술사학 개척자들의 평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오랫동안 신성불가침한 영역이기도 했다. 한때 이들 작품의 양식적 특징은 후기조선사회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근거로 해석되기까지 했다. 한국미술사>
정형민 서울대 교수(동양화과)와 김영식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는 최근 펴낸 <조선후기의 기술도-서양과학의 도입과 미술의 변화> (서울대 출판부 발행)에서 이러한 견해에 반기를 든다. 조선후기의>
이들은 18세기 화가들이 빛과 공간의 이해를 기초로 한 서양미학의 핵심을 담고있는 ‘기술도(technical drawing)’를 비교사적으로 분석, “변화가 일어난 것은 틀림없지만 투시원근법이 도입된 것으로 확정지을 만한 작품은 남아있지 않으며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서양미술기법의 확산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기술도는 기계, 장치 등의 원리를 해설하는 과학기술 서적의 삽화로 원근법, 명암법 등 서구회화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 그림이다. 예수회 선교사,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서양의 기술도가 유입된 중국과 일본에서는 18세기 각각 이 원리를 토대로 한 선법화(線法畵)와 양풍화가 유행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천공개물’(1637), ‘기기도설’(1627) 등 한역(漢譯)된 서양 과학기술서적이 영ㆍ정조 간 대부분 유입됐지만, 이 그림들은 서양미학의 원리를 이해하는 수단이 아니라 화보 역할에 그쳤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기계를 이용해 나무를 깎는 작업을 묘사한 윤두서의 ‘선차도(旋車圖)’나 ‘석공도’는 ‘천공개물’ 등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지만 각각 기계에 대한 설명 대신 “여기(餘技)로 그렸다”는 관서(款書)를 남기고 있거나, 기술적 작업묘사보다는 인물표정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풍속화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바느질, 작두질, 소젖짜기 등 현실적인 소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해 사실주의 회화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거론돼온 조영석의 화집 ‘사제첩(麝臍帖)’도 마찬가지. 주변의 실제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서양화의 면 기법이 아닌 동양화의 선(線) 기법으로 사물을 묘사하고 있으며 공간표현에서도 투시원근법이 아니라 인물배치로 공간의 깊이를 암시하는 전통표현법이 사용되고 있다.
서양화의 음영법이 반영된 것으로 평가되는 화성 용주사의 ‘삼불회도(三佛會圖)’를 근거로 서양화 수용설이 가장 많이 거론됐던 김홍도도 재검토 대상이다. 최근 이 그림이 창건당시의 불화가 아니라 그 이후 중건기, 구체적으로 1912~1915년 제작됐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양 기술도의 이해, 서양미학의 수용은 언제쯤 이뤄졌을까. 책은 기술도의 이해는 성곽의 외부와 이면 구조를 보여주는 <화성성역의궤> (1801)가 가장 빨랐던 것으로 보이며, 빛과 그림자를 표시한 서양미술의 영향은 개화기의 교과서에서나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산 너머 지고 있는 태양을 그린 삽화, 빵을 물고 있는 다리 위에 서 있는 개의 그림자가 비친 냇물을 그린 <심상소학> (1896)의 삽화에 와서야 서양미술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심상소학> 화성성역의궤>
정 교수는 “주체적인 근대성 확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18세기 화가들의 서양 미학 수용론이 꾸준히 거론된 측면이 있다”며 “기술에 대한 관심이 부국강병, 계몽의식 등 근대적 민족주의로 이어진 계몽기에 이르러서야 서양미술의 사고방식ㆍ기법의 도입이 본격화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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