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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강박관념을 털어라

입력
2008.02.0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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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는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주장을 좀 따져봐야겠다. "비영어권 국가 중 국민이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영어를 잘 쓰지 못하는 나라보다 훨씬 잘 산다"고 했다. 틀린 말이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와, 나라는 아니지만 홍콩까지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잘 살고 못 살고를 국민소득만을 기준으로 단순하게 가른다면 싱가포르는 잘 산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자료에 따르면 작년도 구매력 기준 일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8,900달러니까 우리보다 2배 잘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싱가포르는 야당이 사실상 없는 나라다. 중국계와 말레이계의 경제ㆍ사회적 격차도 엄청나다. 외국인이 자칫 잘못하면 죽도록 곤장 맞고 쫓겨나는 나라다. 잘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틀에서 보아 우리가 따라가야 할 나라 꼴은 아니다.

인도는 10% 가까운 높은 성장률 덕분에 잘 사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나라 일인당 GDP는 아직 2,700달러로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궐같은 저택에 사는 10% 안쪽의 영어 잘 하는 부류와 수백 가지 힌디어 방언을 쓰며 아직도 카스트제도에 허덕이는 대다수 빈민이 공존한다.

■ 영어 잘하는 나라가 잘 산다?

똑같이 영국 식민지였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왜 신통치 않은가. 그런데 이런 나라들이 그나마 이런 정도가 된 것을 국민들이 영어를 잘 해서라는 한 가지 이유로 돌리는 것은 사회과학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런 설명 방식을 철학에서는 환원주의의 오류라고 한다.

홍콩이 중국 본토의 상하이나 싱가포르에 밀리는 것이 그사이 주민들의 영어 실력이 줄어서인가? 인도나 말레이시아보다 국민 전체로 볼 때 영어를 훨씬 잘하는 필리핀이 수십 년째 저러고 있는 것이 영어를 못해서인가? 베트남 사람이 영어 잘한다는 얘기 별로 못 들어봤는데 성장률(8.2%)이 왜 중국 못지않은가?

하기야 일본과 중국의 성공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이 100년 이상 수많은 호주, 유럽, 미국 관광객을 꾸준히 끌어들이는 것이 영어를 잘해서인가? 역시 아니다. 그럼 왜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잘 나가기도 하고 못 나가기도 하는가. 깊이 연구해서 답을 잘 찾아보시기 바란다.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정교한 사회과학적 식견까지를 기대하고 싶지는 않다. 영어 잘하는 나라가 잘 산다는 식의 소박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다. 문제는 그런 어설픈 상식을 정책의 근거로 국민에게 강요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고 구체적 정책 방향이 틀어지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국민을 푸근하게 감싸도 모자랄 판에 별 설득력 없는 주장을 가지고 스트레스까지 줘서야 되겠는가.

영어 교육 강화라는 이 당선인의 정책 방향 자체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영어를 영어로만 가르쳐야 한다느니 외래어 표기법을 고쳐야 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오버'를 하기 때문에 반발을 사는 것이다. 오버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영어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 반대 목소리가 안 들리는 이유

그래서 영어로 하는 영어 교육을 위한 과외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거나 아예 조기 영어 유학을 더 일찍 보내는 게 낫겠다는 당연한 우려마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느니 "으레 따르는 저항"이라느니 "내용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게 되는 것이다.

아직 취임까지 20여 일 남았다. 그 기간에 거창한 정책을 또 구상하기보다 뭔가 보여주고 싶은,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털고 홀가분하게 시작하기 바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어나 대운하 사업은 제2의 청계천 프로젝트가 아니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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