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인수위의 보고서에 대해 "이 정도라면 국회 가서 보고해 본 베테랑 부처 국장이면 1~2시간이면 만들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 4개 분과위와 1개 특위가 보름 동안 회의를 거쳐 155개 국정과제를 전반적으로 개괄한 1차 종합 보고서였다.
인수위 측은 그 발언이 피상적 업무보고를 우려한 것일 뿐 질책이 아니었으며, 당시 회의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고 해명했다. 위원들을 질타한 것처럼 전달한 언론 보도는 잘못이거나 과장이라는 주장이었다.
■ 결과만큼 중요한 건 절차ㆍ과정
따지고 보면 어떤 내용이든 그 분야에 능숙하고 통달한 사람이면 혼자서 1~2시간 안에 훌륭한 보고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 것보다 더 빠르다. 보고서의 양식과 분량을 입맛에 맞게 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역대 정권에서 브리핑 잘 하는 공무원들은 언제나 출세를 잘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보고서를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다.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주제로 어떻게 논의를 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당선인의 발언은 놀라웠다. 능률과 실질, 실용을 강조하는 선의에서 나온 말이지만 본의 아니게 파장이 클 수 있다.
이 당선인이 아침 7시 30분 회의에서 샌드위치를 보고 "난 아침을 먹고 왔는데 또 아침을 주네"라고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은 착잡해진다. 입맛이 없어지거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사안과 언어에는 양면이 있다. A라고 말하면 금세 A´가 부각되고 비A 반A가 생겨난다. 특히 생래적인 반대자나 비판자들은 남의 말에 흔히 A가 아닌 것들을 총동원해 반응하곤 한다.
이 당선인은 자타가 알아 주는 아침형 인간이다. 그의 집권으로 대한민국은 예상대로 점차 아침형 나라가 돼 가고 있다. 모든 일정을 1시간씩 앞당기라는 지침에 따라 인수위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는 1시간 빠르게 돼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새벽 5시면 일어나 조깅과 체조로 하루를 여는 이 당선인은 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래 그렇게 생활해온 사람이 일에 게으르거나 행동에 질서가 없고 삶에 정형이 없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아침형의 미덕만 강조되고 권장되는 경우다. 그것은 대불공단의 전봇대 뽑기나 지금 온 나라가 시끄러운 영어교육, 경부 대운하등 모든 문제에 다 해당된다.
이틀 만에 뽑을 수 있는 전봇대를 5년 동안 그대로 두었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전봇대가 문제가 될 때까지 버려둔 공무원들의 게으름이나 책임 회피만이 아닌 구조적 문제까지 함께 종합적으로 살피는 일은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조직 개편안에 대해 서명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힐문하고 추궁하듯 갖가지 질문을 던졌다. 물러나는 대통령으로서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취할 것은 당연히 있다. 이 당선인이 일구어갈 새로운 나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면서도 걱정을 하는 것은 각종 정책의 결정과정과 그 절차에 불안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산 통과가 힘든 것이 민주주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당선인처럼 '불도저'라는 말을 들었던 장기영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명언이다.
■ 앞을 보면서도 뒤를 아는 자세
이 당선인이 서울시장일 당시, 어떤 모임에서 술병을 들고 술을 돌리던 때의 일이다. 그는 놀랍게도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 당선인은 그 때 "CEO는 앞을 보면서 뒤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뒤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파악과 이해는 대통령에게 더욱더 중요한 일이다.
그가 오전 5시에 일어나는 것과 달리 그 시간에는 죽어도 못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그 시간부터 잠을 자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절차와 과정, 소통의 문제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실용'에 올라 탄 과욕ㆍ과속은 오히려 일을 망친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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