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나 언어차별에서 그 차별의 주체와 객체는 대체로 또렷하고 고정적이다. 미국 사회에서 앵글로색슨계를 비롯한 백인 혈통 시민과 아프리카계 시민 사이의 권력 관계가 투명하듯, 대부분의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 영어사용자(또는 표준어 사용자)와 비-영어사용자(또는 방언 사용자)의 권력관계도 투명하다.
그러나 나이차별(ageism)은 그 주체집단과 객체집단이 그만큼 또렷하거나 고정돼 있지 않다.
흔히 나이차별은 상대적 노령자에 대한 차별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현대 사회는 나이듦을 그 주체의 사회경제적 불이익과 연결하는 문화적 통로를 갖추고 있다.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사람들은 대개 일자리에서 물러난다. 퇴직을 나이와 연관시키는 이 제도적 강제가 정년제다.
연령제한의 그림자는 노동의 끝머리만이 아니라 첫머리에도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조차, 어떤 나이를 넘기면 사기업의 수습사원이 될 수도 없고 공무원 시험을 치를 수도 없다.
■ 배제되고 소외되는 젊은 세대
젊음은 아름다움과 활력을 뜻하므로, 청춘송가는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젊어 보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미용술이나 성형수술은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헬스클럽 회원 명부에는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다. 광고 카피로 상징되는 시장언어는 젊음의 찬양 일색이다.
정치권에서도 간헐적으로 '새로운 피'에 대한 욕구가 발설된다. 그러니 나이 먹는 것이 겁나지 않을 수 없다. 나이든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진다는 뜻이다. 버텨내려 안간힘을 써도, 그간 누려온 지위와 역할을 잃기 십상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결국 배제되고 소외된다.
그러나 나이차별이 이 방향으로만 작동할까? 배제되고 소외되는 것은 정녕 나이든 사람들일까? 부분적으로만 그런 것 같다. 세대적 이기심('유대감'이라 해도 좋다)에서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억척스러워 보인다. 이 억척스러움 역시 자연스럽다. 나이든 세대는 젊은 세대에 견줘 생물학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젊음을 우러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들이 지니지 못한 그 젊음을 질투한다. 그래서 젊은이들과 좋은 것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늘, 한 목소리로, '요즘 젊은것들'을 탓한다. 툭하면 보도 카메라 앞에서 생뚱맞은 소리를 내뱉는 자칭 '원로'들이나 오래 지켜온 가치들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보수주의자들만 그런 게 아니다. '요즘 젊은것들' 타령에는 좌우가 따로 없다.
문제는 바로 이 나이든 세대에게 한 사회의 자본이, 물질자본이든 상징자본이든, 쏠려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그들은 기득권자다. 노동시장으로 들어가려는 젊은이들을 막아 선 높다란 장벽의 일부분은 나이든 정규직 노동자들의 세대적 이기심이라는 벽돌로 이뤄져 있다.
시대의 끈을 놓아버린 옛 얼굴들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세력을 이루고 있는 이유 하나도 나이든 기득권자들의 세대적 이기심에서 찾을 수 있을 테다.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노동력을 잃은 뒤에도 해묵은 세대적 이기심을 견지할 것이다. 그들은 노령사회 안의 양적 우세에 기대어, 즉 투표권을 이용해, 자신들을 먹여 살려야 할 젊은 세대에게 불리하도록 사회적 결정을 유도할 것이다.
■ 다음 세대 배려는 種的 正義
새 대통령 당선자는 지금 대통령보다 열 살이 더 된 나이에 국가수반으로 뽑혔다. 새 정권의 중핵을 이루게 될 이들의 나이도 지금 정권보다 다소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사행심도 일종의 희망이라 우기며, 나는 가망없는 요행수 하나를 바란다. 젊은 세대의 희망을 업고 태어난 노무현 정부가 그 세대를 절망으로 내몰았던 것처럼, 나이든 세대의 정권 이명박 정부가 젊은 세대의 친구가 됐으면 하는.
뒷세대를 위해 자기 세대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의 종적(種的) 정의(正義)이기도 하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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