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고 어머니가 앞을 보지 못해 스님이었던 이모의 손에 끌려 열두살 때 수덕사에 들어간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이 만공 스님에게 처음으로 인사들 드릴 때였다.
머리카락이 별로 남아있지 않던 만공 스님의 머리를 보고 있는데 “내 머리는 공산명월이야” 하더니 다짜고짜 주장자로 한 대 때리는 것이었다. “아야!” 하고 소리를 지르자 만공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아프냐?”
“머리를 때렸으니 머리가 아프지요.”
그러자 다시 한번 주장자가 머리로 날아왔다.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소리를 내자 또 물었다. “아픈 놈이 무엇인고?” 같이 둘러앉아 있던 여러 스님들의 웃음 속에 물러나온 열두살 소년은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만공 스님이 다시 불러 가 보았더니 “아픈 곳은 머리인데 어째서 소리를 지른 것은 입이었을까? 아프다고 소리지르게 한 놈이 과연 어떤 놈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절을 쓸고 밥을 하고 잔심부름을 하면서 한참이 지난 후 그 놈이 ‘마음’인 것 같다고 하자 만공 스님은 서른 살 먹은 중보다 공부를 잘 했다면서 “그 마음이라고 하는 놈이 어디 있더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스님이 되기 위해 출가했지만 아직 계를 받지 못한 예비수행자를 행자라고 한다. 행자시절은 출가수행자의 기초를 다지는 참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해인사 스님들이 내는 월간 <해인> 에 1996년부터 2007년까지 12년 동안 연재된 112명 스님들의 행자시절 이야기가 <나의 행자시절 1,2,3> (다할미디어)으로 꾸며져 나왔다. 행자시절은 고생으로 점철돼있지만 불가에 들어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봉화 축서사 주지 무여 스님은 넉넉한 집안에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출가해 상원사에서 행자시절을 보냈다. 나의> 해인>
여러 수좌스님들과 살면서 ‘내가 누구인가’하는 공부에만 전념했던 당시 “내가 참 좋은 길에 들어섰구나”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속가에서 살면 서른을 넘기지 못할 관상이라고 해서 절에 들어간 조계종 포교원장 혜총 스님은 전생의 고향을 찾은 것처럼 마음이 편했고, 스님들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회상했다.
행자시절의 애환과 인간적인 모습도 솔직하게 표현돼 있다. 도선사 주지 혜자 스님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출가한 뒤 새벽 3시에 일어나 밥짓는 일이 너무 힘들어 꾀병을 부리며 하루종일 누워있던 일화를 소개했다.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한 진주 연화사 주지 혜일 스님은 거칠고 반항적이었던 세속의 때를 버리지 못해 넉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장군죽비 세례를 받아야 했다. 도를 배워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에 도인을 만나려고 부산 범어사에서 “이 절에서 제일 큰 중 나와라”하고 고함쳤다는 조계종 원로 성수스님의 젊은 시절 당돌함이 정답게 느껴진다.
여러 스님들의 회고에는 한국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만공, 한암, 효봉, 청담, 성철 스님 등에 대한 제자들의 존경과 그리움이 배어있다. 12년 동안 행자일기를 취재해 연재한 작가 박원자씨는 “맑고 청정한 스님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청복의 순례길이었다”고 말했다.
남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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