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 서울을 배경으로 만든 ‘경성(京城) 코미듸’ 두 편이 나란히 개봉한다. 정용기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과 하기호 감독의 <라듸오 데이즈> . 개봉(31일)을 사흘 앞두고 두 작품의 주연 배우를 몇 시간 간격으로 만났다. 라듸오> 원스>
박용우(37)와 류승범(27). 영화에서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두 사람이지만, 마주 앉았을 때 받는 느낌은 비슷했다. 넉넉하고 부드러운 미소, 나직한 목소리. 테이블에는, 둘 다 두터운 재가 쌓인 재떨이를 놓고 있었다.
■ “민족혼이 밥 먹여 주나? 오까네가 아리마센인데(돈이 없는데)….”
건들건들 클럽 가수에게 수작을 거는 한량. 박용우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에서 민족의 현실 따위는 전혀 머릿속에 없는 듯한 사기꾼 봉구 역할을 맡았다. 훔치고, 속이고, 팔아 먹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그러나 결코 악역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느끼하되 거북하지 않은 표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 배우의 장점이다. 원스>
“그렇게 봤다면 대성공이죠. 촬영하면서 걱정을 많이 한 부분이에요. 주인공이 밉게 보이면 안 되는데…. 그래서 군데군데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일본 헌병이 목에 칼을 들이댔을 때, 무게를 잡다가도 ‘앗 따거’ 하고 엄살을 부리는 모습 같은 것 말이에요. 말하자면, 의도와 설정이 많이 가미된 애드리브죠.”
■ 변신(變身)
배우 박용우는 폭이 넓다. <호로비츠를 위하여> 의 어리숙한 피자집 사장부터 <뷰티풀 선데이> 의 각진 영혼을 지닌 형사까지, 해를 건너 뛰는 법 없이 촘촘히 채워나간 필모그래피에는 정말 다양한 캐릭터가 담겨 있다. 이번에는 과격한 몸짓 속에서 웃음을 유발해야 하는 코믹 액션이다. 뷰티풀> 호로비츠를>
“연기에는 종류가 없다고 생각해요. 코미디든 멜로든 기획의도와 상황에 맞게 진지하게 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코믹 연기도 따로 있는 게 아니겠죠. 다른 연기는 다 잘 하는데, 유독 코미디만 못하고 그런 건 없다고 봐요. 코미디라는 상황을 흡수하지 못하고 몰입하지 못하는 거겠죠.,”
■ 역설(逆說)
마흔을 3년 앞둔 나이. 박용우의 얼굴에는 이미 몇 가닥의 주름이 잡혀 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유독 곱게 보이는 순간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표독함을 뿜어내는 강렬한 표정을 지을 때다. 박용우의 설명하기 힘든 에너지이면서, 어쩔 수 없는 이물감이다.
“사실 거친 배역을 맡을 때는 거친 표정이 나오도록 노력해요. 근데 정말 숨길 수 없는 부분이 눈이에요. 탁한 눈빛을 만들려고 잠도 안 자고, 깡소주도 마셔 보고… 그래도 안 되더라구요. ‘이에 내 한계인가’ 이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악마 같은 사람도 굉장히 불쌍한 면, 맑은 면이 있는 것 아닐까요.”
■ 호흡(呼吸)
박용우는 최근 3, 4년 동안 예닐곱 편의 영화에 끊임없이 출연했다. 겹치기 출연은 없었지만, 분명 다작 배우의 범주에 포함되는 양이다. ‘자신’을 도구 삼아 다른 이를 표현하는 배우로서,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것에 대한 불안함은 없을까.
“아직 고갈된다고 느낄 만큼 내공이 있는 배우가 아니라서… 오히려 작품을 할 때마다 내공이 쌓이는 것을 느껴요. 그런 점에서 배우라는 직업이 잘 맞는 거죠. 전 철든 어린아이 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자신의 감성에 충실하되, 절제를 아는. 그래서 아직은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다~ 귀찮다. 다음에 하자, 다음에!”
“따뜻한 느낌, 친구 사귀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어요. 이 영화는 참 ‘착한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입에 욕을 한 다발 물고,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세운 배우로 류승범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라듸오 데이즈> 는 상당히 낯설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야생성을 버렸다. 오히려 에너지를 꾹꾹 누르며 영화의 나긋한 흐름 속에 자신을 녹인다. 라듸오>
“함께 출연한 배우들이 각자의 색깔을 충분히 낼 수 있도록 개인적인 욕심을 버렸어요. 이번엔 내 개인의 캐릭터로 흐름을 이끌어가는 영화가 아니잖아요. 연기를 안 한다고 생각하고 연기하려고 노력했죠. 영화 속에서도 내가 맡은 로이드PD보다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는 거고요.”
■ 변신(變身)
그는 항상 ‘상환’이었다.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부터 <아라한 장풍대작전> , <주먹이 운다> 까지 형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작품 속에서 그의 이름은 모두 같았다. 거대한 벽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에, 그는 온몸을 내던져 금을 냈다. 다른 이름을 얻은 영화들 속에서도, 그는 항상 한 마리 야생동물로 그려졌다. 주먹이> 아라한> 죽거나>
“변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음…예전엔 나 자신을 혹사시키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껴왔다면, 이제 나를 더 사랑하고 아껴주고 싶어요. 이젠 답답함도 즐길 수 있고,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여유가 생긴 거죠.” 변화의 이유를 찾으려는 기자의 눈빛에,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대답했다.
■ 역설(逆說)
그러나 눈빛에 독기가 풀리고 턱근육의 결이 사라지자, 오히려 왠지 모를 불안과 불편이 느껴진다. 단지 낯설다는 사실에서 오는 이질감이 아니다. 반항적 아웃사이더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는 류승범의 모습에서, 되레 일탈하는 영혼을 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런 이미지들이 꼭 나 자신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반드시 허상이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면, 그 속에는 그걸 부인하고 싶어하는 나 자신의 본모습도 있겠죠. 하지만, 뭐랄까…. 예전엔 청춘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그것에만 집착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좀 더 폭 넓게 ‘사람’을 탐구하고 싶어요.”
■ 호흡(呼吸)
1년 일하고 1년 쉬는 간격을 지켜온 류승범에게 배우라는 직업이 잘 맞느냐고 물어봤다. “그럼요. 난 내가 싫은 일은 절대 못해요. 전, 좀 미안한 얘기지만,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불쌍해요. 자기 시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쓰지 못하잖아요.”
아직 20대의 터널을 채 지나지도 않았지만, 그는 거친 호흡으로 달려온 삶에서 어떤 전환점을 맞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성숙함을 연기로 연결짓는 것이 류승범의 숙제. “이번 영화 찍으면서, 한 발 물러서서 상대의 연기를 받쳐주는 내 자신이 왠지 대견스럽게 느껴지더라구요.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좀 웃긴가? 하하.”
유상호기자 shy@hk.co.kr사진=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 원스 어폰 어 타임·라듸오 데이즈
민족 수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꼭 비장할 필요가 있을까. 이 작품들은 과감히 ‘아니다’라고 소리친다. 주인공은 각각 사기꾼과 일제의 검열을 받는 방송국 PD.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새로운 시도 자체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명절마다 등장하던 조폭코미디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만도 어딘가. 오락영화를 만들 때도, 머리를 굴려야 한다. 이제부터는.
암울하고 데카당한 이미지로 각인된 일제 말기의 경성 거리. 하지만 그 시절에 사람들이 독립운동만 생각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원스어폰어타임> 은 30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동방의 빛’을 둘러싼 사기꾼(박용우)과 도둑(이보영), 그리고 일본군의 갈등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마지막 반전의 순간까지, 액션과 코미디, 비교적 짜임새 있는 드라마가 경쾌하게 이어진다. 원스어폰어타임>
<라듸오 데이즈> 는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시선을 맞춘다. 경성 최초의 방송국에서 라디오 연속극을 시작하고, 좌충우돌 하루하루 간신히 드라마를 이어나간다. 사주의 압력과 PPL(간접광고) 등, 오늘날 방송의 현실을 패러디해 넣은 장면이 웃음을 자아낸다. 라듸오>
두 영화 모두 민족주의라는 코드를 슬며시 녹여 넣지만, 그것이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립군의 모습을 칠칠맞지 못한 코믹 조연으로 처리한 발상이 참신하다. 12세 관람가.
유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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