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서울 서초구청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간부회의를 영어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모든 간부들이 석 달 동안 퇴근 후에 영어 교육을 받았다.
올해에도 분기마다 한 번씩은 영어로 회의를 하겠다고 한다. 한국인 구민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구청이 왜 회의를 영어로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더구나 수십 명의 간부 중에서 영어로 의견을 충분히 개진하고 그걸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됐을지 의문이다. 회의 현장을 떠올리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서글프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일은 대한민국 곳곳에서 벌어진다. 영어와 아무 관계 없는 기업의 직원 승진시험에 반드시 토플 몇 점 이상이 들어가고, 영어 쓸 일 없는 분야의 공무원들이 토플, 토익 성적을 위조했다가 적발되기도 한다. 맡은 일에 영어가 필요한지 여부와 관계없이 영어는 반드시 잘해야 하는 것으로 돼 있다.
영어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지만 스트레스 정도가 아니라 강박관념이요 광신이다. 우리 사회가 불필요한 영어에 조금만 덜 신경을 써도 행복지수는 상당히 올라갈 것이다. 쓸 데 없이 영어에 들이는 시간과 돈을 조금만 운동과 문화생활에 투자한다면 삶이 한결 나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국문과 교수가 영어로 강의를 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코믹한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진다. 한국문학을 전공한 영어권 출신 교수에게 맡기면 될 일을 굳이 나서서, 본인도 괴롭고 듣는 학생들도 괴롭다.
대한민국의 수출이 3년째 두 자릿수 증가세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수출 기업 직원들이 영어를 잘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물건과 서비스가 가격과 질 면에서 우위에 있기 때문일까.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 관광객 증가세가 영 신통치 않은 것은 근본적으로 한국인이 영어를 못 해서일까, 아니면 관광자원이 빈약해서일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영어 교육을 강화하겠다면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막연히 모든 사람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있다고 본다.
이런 강박관념은 영어가 잘 안 되는 사람일수록 더하다. 21세기에 영어의 중요성이 더더욱 커질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영어만 잘한다고 경쟁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영어권 국민들은 모두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영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무능하고 무식할 수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하이데거의 깊은 통찰이 뚱딴지같은 헛소리로 들리는 시대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