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제시한 차기정부 영어교육 정책 파장이 겉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연간 15조원이나 되는 사교육비를 절감하고, '기러기 아빠' 양산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영어 공교육 강화"라는 게 인수위측 논리지만, 일선 교육 현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찬성의 목소리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사교육비를 되레 늘리고, 영어 스트레스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교사들의 입장이 궁금했다. 국내 최대 교원단체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이원희(56) 회장은 "인수위의 영어교육 정책 방향은 공감하나 그렇다고 절대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일침을 놨다.
이 회장은 "교육은 즉시 해결이 가능한 전봇대를 뽑는 일과는 다르다"며 "씨를 뿌리고 꽃을 가꾸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공교육이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고교 교사 출신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인수위측에 던진 충고다.
-인수위 영어교육 정책이 왜 논란이라고 보나.
"기본적으로 공교육이 살아야 소득 3만달러 시대를 달성할 수 있다. 인수위는 기러기 아빠 문제를 해결하고 15조원에 달하는 영어 사교육비 폐해를 막으려면 영어 공교육 강화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영어가 글로벌 시대 경쟁력의 원천이다보니 공교육을 통해 해결해야 경제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생각인 것 같다.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이 영어교육을 제대로 접하지 못해 국제적 인재로 키워낼 수 없는 현실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어를 통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례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는 허점이 많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교사영어자격인증 등 연수 부분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눈치인데, 초ㆍ중ㆍ고교 3만명의 영어교사를 대상으로 전면적으로 실시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를 위해 연수 방법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인증제가 교사의 영어능력을 향상시키는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다. 인프라를 갖춘 교육방송(EBS)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EBS가 충분한 콘텐트를 제공해 교사들이 의지를 갖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인력은 충분 '현장 재교육' 통한 질적 향상이 관건"
"영어능력평가시험, 입시 앞둔 고 3에겐 부담될 것"
"몰입교육은 자율형사립고 등 일부 학교에 한정해야"
-고교 영어수업을 확대하겠다는 인수위 구상에 대해 교단이 들끓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교사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나.
"고교 영어수업 확대 방안에는 총론적으로 찬성한다. 단 교사가 교육의 주체가 돼야 한다. 현재 영어 수업이 가능한 60%의 선생님들에게 우선 기회를 부여하고, 순차적으로 다른 교사에게까지 연수 문호를 넓혀야 한다. 몇 가지 선결 조건은 있다. 첫째, 누구나 공감하듯 지금처럼 한 학급에 40명이나 되는 학생 수로는 개별 회화수업이 어렵다. 아무리 많더라도 15명 수준을 맞춰야 참여 수업이 가능하다. 재정적 지원이 뒤따라야함은 물론이다. 이경숙 위원장은 5조만 투입하면 된다는 생각이지만 쉽지 않다. 국가 차원의 과제이고 최소 총리실 이상의 문제로 판단한다. 이 당선인도 공감하고 있다. 둘째, 수업 여건이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말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청각 시설의 확보가 절실하다. 셋째, 교육 과정의 개선이다. 영어 수업 시간을 늘리려 해도 다른 과목에 할당된 시간을 줄일 수 없기 때문에 재량수업, 특별활동 등 보충학습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가장 난관이 예상돼 새 정부가 즉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넷째, 콘텐트, 즉 효율적 수업을 담보하는 교재와 수업 자료가 관건이다."
-2010년이라는 적용 시기는 적절한가.
"2010년 전면 실시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시범 실시를 통해 최선의 방법을 도출해야 한다. 새 정부는 터만 닦는다는 마음가짐으로 10년을 내다본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과실은 다음 정부의 몫으로 넘기는 게 옳다. 5년 안에 공교육을 뜯어 고치려는 생각이라면 고교 과정을 배제하고 초등학교 5학년생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만드는 게 낫다."
-영어전용교사제와 자격증제도 도입도 거론되고 있다. 실효성 논란이 적지 않은데.
"특정 대학이 중심이 된 테솔(TESOL)을 활용하겠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심지어 일선 교육청에서는 교사들에게 영어교사 자격증을 줄 것 같은 태도마저 취하고 있다. 교직사회의 편을 갈라 손쉽게 교사를 충원하겠다는 탁상행정의 표본이다. 이런 아이디어 수준의 대안들은 코드 맞추기에 불과하다. 영어 교사는 이미 충분히 확보돼 있다. 교사들에게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만 주면 된다. 물론 영어에 능통한 주부나 해외 유학생을 보조교사로 활용한다는 방안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교사에게는 학생을 관리하는 담임의 역할이 있다. 다른 행정 업무도 수행해야 한다. 이들을 적절히 활용하되, 전면적인 교직 개방쪽으로 가서는 곤란하다. 공교육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삼진아웃제나 병역 특례 얘기도 나왔지만 역시 일시적인 성과주의에 기댄 졸속 방안이다. 인수위가 과속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 당선인의 의도도 아닐 것이다. 인수위은 큰 틀만 제시하고 전문가와 교육과학부에서 단계적 추진안을 만들어가는 절차가 필요하다."
-원어민 교사 증원이 영어 공교육 강화와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나.
"현재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영어마을은 엄청난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외국인 원어민 교사들이 범죄를 일으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전시용 충원이라면 실패는 불보듯 뻔하다. 원어민이 정식 보조교사로서 한국인 교사와 함께 수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인수위는 영어 공교육 강화에 올인하는 가장 큰 이유로 사교육비 절감을 들고 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놔도 사교육을 완전히 잡을 수는 없다. 공교육에서 소외된 지역 및 계층의 아이들이 더 큰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측면을 중시해야 한다. 실시하지 않기로 결론이 난 몰입교육은 부단한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싱가포르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자율형사립고처럼 비슷한 학업 능력을 갖춘 학생들로 대상을 한정해야 한다. 모든 고교에 적용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국민 여론이 지렛대다. 영어의 권력화는 이제 공공연한 말이 됐다. 우리 사회가 영어를 희망으로 보고 있다. 영어 공용화 논란에 앞서 학부모, 학생들의 바람이 고품질의 교육을 원한다면 공교육이 이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과목을 대체할 상시 영어능력평가시험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영어능력평가시험은 수능 과목 축소와 맞물려 있다. 말하기, 쓰기 등 실용영어를 강조하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방향 전환의 필요성은 있다고 본다. 문제는 입시를 앞둔 고교 3학년생에게까지 회화 중심의 영어 교육이 적절한가하는 부분이다. 고교 2학년만 돼도 전공 선택을 고민해야 한다. 따라서 실용 영어는 고교 1학년까지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2학년부터는 전공에 필요한 원서 독해가 가능한 한 차원 높은 영어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중차대한 영어 공교육 정책을 내놓으면서 현장 교사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지 않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차기 정부가 강조하는 '실용 정신'은 현장에서 가능한 일부터 먼저 하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수위의 영어교육 강화방안에는) 현장 전문가의 시각이 담겨있지 않다. 자주 만나고 토론해서 정책을 다듬는 작업을 반복해야 실력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반대를 위한 반대, 혹은 대결 구도를 만들자는 게 아니다. 공교육이 구심점이 돼야 한다. 충북도교육청은 최근 24명의 스타교사를 선정했다. 이들의 참신한 교수법을 전국 모든 선생님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현장 연수를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이런 논의 과정이 정착되면 우리 공교육의 성공 노하우를 전수하는 날도 머지않아 보게될 것이다. 교총이 인수위에 '현장교육지원센터' 설치를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교육부는 국가로서의 책임을 지고, 교육청도 코드 맞추기만 할 것이 아니라 교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부 시ㆍ도교육청은 벌써부터 차기정부 영어교육 정책에 순응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영어교사자격증을 만들고 영어수업 시간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일선 교사들과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머리를 맞댔는지 묻고 싶다. 지역 마다 재정자립도에 큰 차이가 있는데 국가 단위에서 지원 여부를 따져야 할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교사를 대상으로 등수를 매기고 합격증서를 준다는 게 관료적 입장에서는 쉬울지 몰라도 현장에서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새 정부가 추진하려는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는 국가의 명운이 달린 문제다. 다른 의도가 개입되면 본질이 흐려진다."
■ 약력
▦ 1952년 충북 청주생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 고려대 교육대학원 졸업 ▦ 서울사대부중, 서울 경복고·잠실고 국어 교사 ▦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 전문위원, 교육부 논술심의위원회 부위원장, EBS논술연구소 전문위원, 교총 수석부회장
진행= 김진각 사회부 차장 kimjg@hk.co.kr정리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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