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국은 아주 유능하다. 제국대학 의과대학 출신인 그는 최단시간 개복수술 기록을 가지고 있는 탁월한 의사다. 대학병원에서조차 고개를 저은 환자들까지 그의 병원으로 밀려온다.
이인국은 철저하다. 아무나 상대하지 않는다. 그가 정한 '환자의 기준'은 두 가지, 돈과 권력이다. 진료카드에서 맨 먼저 보는 것도 환자의 지위와 재력이다.
30년 동안 원칙을 바꾼 적이 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광복 뒤에는 고향에 진주한 소련군, 1.4후퇴 후 서울에서는 권력층과 재벌과 미국인에게 아첨한다.
■ 기회주의자들의 놀이마당
이인국은 약삭빠르다. 권력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재빨리 빌붙는다. 의술은 그 기회를 위한 무기이고 수단이다. 이념도, 조국도, 동포도, 양심도, 소신도 없다. 오직 개인의 영달만이 있을 뿐이다. 기꺼이 모범적인 황국신민이 됐고, 그 때문에 죽을 고비를 맞자 소련군에 아부해 살아나고, 문화재를 무더기로 선물해 미국 대사관 간부에게서 국무부 초청장을 받아냈다.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다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었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전광용(1919~1988)의 소설 <꺼삐딴 리> (1962년)는 이렇게 이인국을 통해 기회주의 인간을 고발한다. 냉소는 제목에서부터 강하게 드러난다. 얼굴의 혹 수술을 받은 소련장교가 붙여준 별명 '꺼삐딴 리'는 하나의 상징이다. 만약 작가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썼다면, 미국 유학파 출신 이인국에게 '닥터 리'란 또 하나의 별명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꺼삐딴>
이인국과 동시대에 2개의 다른 이름을 갖고 살아간 작품 속의 인물이 또 있다. 영화 <명자, 쏘냐, 아키코> (1992년)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누구도 제목이 된 '쏘냐'란 이름을 기회주의 상징으로 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일본과 사할린을 떠돌며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여인 '쏘냐'는 우리의 비극적 현대사가 남긴 상처와 운명의 상징일 뿐이다. 명자,>
'꺼삐딴 리'를 보면 기회주의자가 되기도 쉽지 않다. 유능한 명문대 출신에 머리 회전도 빨라야 한다. "언제 그랬냐"며 하루아침에 얼굴을 바꾸는 뻔뻔함과 배짱이 있어야 하고, 때론 배신도 하고 소중한 것을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채 누구처럼 어설프게 수를 쓰다가는 망신만 당한다. 과잉 충성으로만 치닫다가는 오히려 위기를 맞는다.
기회주의자들은 "인재가 부족하다"고 할 때를 가장 좋아한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이승만 정부부터 그랬다. "정의가 실패하고 기회주의가 성공한 나라"라고 분개하면서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또 어땠나.
집권초기 정책실장을 맡았던 이정우 교수가 "이제는 이명박 정부에 줄을 서는 기회주의자들을 기용한 것은 잘못"이라고 한탄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뒤집으면 이명박 정부 역시 기회주의자의 마당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 '도적'에게 기회주지 않아야
곳곳에서 그 징후를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대통령직 인수위에도, 경찰에도, 공직사회에도, 문화예술계에도 갑자기 색깔을 바꾸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이들을 보면 차라리 "친노가 주홍글씨가 된 현실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안희정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가 기회주의자에게까지 기회를 준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돈키호테> 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말처럼, 그 기회야말로 도적을 만드는 일이다. 돈키호테>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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