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고자 하는 개념이나 화두가 '실용'인 듯하다. 한 때 실용정부라는 명칭을 고려했다 하니 그 의의는 두 말할 필요도 없겠다.
어느 일간지는 새 정부의 노선이 '실용을 앞세워 이념의 거품을 뺐다는 사실이 앞선 정권과 차별화되는 중요한 특징'이라고도 했다.
■ 새 정부 실용이 중도는 아닌 듯
실제, 지난 10년을 좌파 정부로 규정하고 선거운동을 펼쳐온 이명박 당선인에게, 실용은 반좌파 운동의 도구였다. 그러다 보니 막상 선거가 끝나고 나서, 실용이라는 담론의 내용을 채우기가 만만찮을 성 싶다.
실용이 이념의 대립항이라면 그것은 어떤 내용을 대하는 '태도'일 따름이지 내용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실용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이전 정부들의 정책과 노선에 대해서도 계승할 부분은 시원하게 계승해야 할 텐데, 전 정부들을 이념정부로 규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실용주의와 반 노무현 정서에 기대고 있는 새 정부에 선뜻 그러고 싶은 기색은 없는 듯하다. 중도주의라면 필요할 경우 좌우파 정책을 차별하지 않고 어떤 정책이라도 채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텐데 말이다.
이런 상태대로라면 새 정부의 실용주의는 보-보 대결, 즉 보수 대 보수 구도 하에서의 정책 공조를 의미하는 것이 될 전망이다. 대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의제 정립에 혼선을 빚고 있는 구 여당을 몰아 붙이고 이미 분열된 보수세력 구도를 활용한다면,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총선에서 보수 일색의 보-보 구도를 형성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듯 싶다.
인수위가 내걸고 있는 실용주의 정책과 노선들에 포퓰리즘의 냄새가 나는 것도 이런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닐까? 앞선 정부의 성과를 계승하고 당선인의 공약 이행 방법을 검토하는 전문가 집단이 되어야 할 인수위에서 눈 앞의 총선을 겨냥한 정치 공학의 냄새가 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평가해 본다면 인수위가 관료체제를 대중의 공적(公敵)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선거 공학으로 보면 결코 나쁜 구도는 아니다. 특히 통일부 해체와 같은 충격적인 조치들일수록 그 효과는 더 높게 마련이다. 당파적 이익에 비추어 본다면 인수위 활동은 성공적이라 하겠다.
실용주의라는 것이 진리나 가치 판단의 기준을 사회 내부의 '실제적 유용성'에 두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그 유용성에 대한 합의를 형성시키는 메카니즘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 실용주의는 경합하는 주장 중 무엇이 유용한 것인가에 대한 공중(公衆)의 승인을 전제로 한다. 무엇이 유용성인가에 대한 합의를 형성시키는 메커니즘, 곧 절차로서의 민주주의인 공중의 승인을 피해가서도, 피해갈 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실용주의가 보-보 체제의 도구로 사용될까 우려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실용이라는 것이 절차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결과주의를 조장할까 해서이다. 이는 절차의 강조를 권한의 제약으로 착각하고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상이 또 나타날까 하는 우려와 맥이 닿아 있다.
■ 절차 무시하면 민주주의 붕괴
실용주의가 조급한 이벤트성 성과주의에 치우쳐 절차의 구속을 거부한다면, 거기서 또 다른 갈등이 발생하고 그 갈등의 해결 과정은 이념적으로 된다는 뜻이다. 결국 실용이 또 다른 이념이 될 때 '돌파'의 방식은 일상화되고 그것마저 실패할 경우 국론 분열을 회복할 길은 없다.
더 어려운 것은 절차에는 공식적인 것도 있지만 비공식적인 것도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선거를 통해 등장한 다수자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면 되지만, 후자는 시간이 지나야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미숙한 정치인에게 민주주의는 시간만 잡아먹는 고비용인 듯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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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철 숭실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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