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젊은 성악가들의 기세가 대단하다. 작년 초 스페인에서 열린 한 콩쿠르를 참관한 필자의 지인은 참가자의 3분의1, 결선 진출자의 40%가 한국인이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반면 중국이나 일본 쪽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더라고 했다. 물론 오페라의 스타로 떠오르려면 노래만 잘한다고 되지 않는다.
서구문화의 전통에 대한 이해, 캐릭터에 어울리는 외모와 연기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아직까지 한국 성악가들이 취약하지만, 어쩌면 미국 성악가들이 유럽 무대의 한 축을 차지하던 현상이 머지않아 한국 성악가의 몫으로 넘어올 지도 모르겠다.
그 불씨를 당긴 이는 누구인가? 당연히 소프라노 김영미(54)를 꼽아야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는 1977년부터 81년 사이에 여러 세계 주요 콩쿠르에서 최상위 입상했다.
그후 뉴욕 시티 오페라, 휴스턴 오페라, 필라델피아 오페라, 올란도 오페라 등 주로 미국 무대에서 주역을 노래했는데, 김영미 이전의 동양권 가수로 이 정도 활동을 한 이는 <나비부인> 으로 유명했던 일본 소프라노 하야시 야스코 정도일 것이다. 나비부인>
김영미가 결국 세계무대보다 국내에서 후학을 기르면서 연주 활동을 병행하는 길을 택한 것은 아쉽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오페라 본고장에서 비올레타나 미미 역을 동양인이 부른다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시절이었다.
2006년 11월, 세계적 바리톤 레나토 브루손의 독창회에 함께 출연한 김영미를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감탄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연주력은 떨어졌으리라 상상한 것은 오산이었고, 벨칸토 오페라의 디바를 넘어 진정한 대형 소프라노다운 풍모를 보여주었다.
베르디 바리톤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브루손으로서도 <일 트로바토레> 의 극적인 이중창 ‘들어라, 아침이 밝아오면’을 이만큼 부르는 파트너를 만난 적은 드물었으리라. 일>
김영미가 ‘오페라 30년, 벨칸토 30년’이란 타이틀로 리사이틀(3월 8일, 예술의전당)을 갖는다. 올해가 한국에서 오페라가 처음 상연된 지 60년째인데 그 절반의 세월동안 김영미가 활동했던 셈이다.
원로가수의 회갑기념 음악회처럼 생각하지 마시라. 김영미는 아직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고 한국 남성 성악계의 대표적 대형 가수인 김남두(테너)와 고성현(바리톤)도 출연한다. 게다가 김영미가 교편을 잡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제자들이 멋진 앙상블로 보답한다고 하니 본고장의 스케일을 능가하는 대단한 무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음악공동체 무지크바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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