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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1세대 김기탁의 한국을 세계에 팔다] <3> "한국산 엽연초로 외화벌이" 아이디어 번뜩… 1억弗이상 수출실적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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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1세대 김기탁의 한국을 세계에 팔다] <3> "한국산 엽연초로 외화벌이" 아이디어 번뜩… 1억弗이상 수출실적 대박

입력
2008.01.2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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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을 온 지 석 달이 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족들이 무사히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했다. 부산에 오기까지 여러 차례 생사를 넘나들었다. 당시 연세대에 다니던 둘째 동생은 북한으로 납치될 뻔하기도 했다. 다행히 충북 괴산에서 탈출에 성공해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몸을 추스르고 보니 다시 서울로 올라가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올라와 보니 예상대로 서울은 쑥대밭이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졌고 다시 시작할 자신도 없어졌다. 그러나 내겐 소중한 가족이 있었고 본능적으로 무역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그 때 전쟁으로 망가진 통신 체계를 복구해야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홍콩시장에서 전화기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EMD 교환시설을 도입해 체신부에 납품했다. 독일의 건의로 EMD 공장을 짓기도 했다. 통신 기자재 수입으로 내 무역 인생에 다시 불이 붙었고 홍콩 무역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통신 기자재 수입 사업으로 돈을 번 나는 다음 타깃을 찾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1960년대 초반, 내 고민은 ‘어떻게 외화벌이를 할 것인가’였다. 그 때 떠오른 것이 엽연초였다. 충청 지역에서 생산되는 황색엽을 독일을 비롯한 유럽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한국 엽연초가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수출 물량이 급증했다. 나중에는 미국의 한 회사에 엽연초를 본격수출하기 시작했다. 미국 담당자들이 한국에 직접 와서 1년 이상 머무르며 협상을 하기도 했다. 미국과 합작해 한미엽연초 공장도 설립했다. 당시 엽연초로 1억달러 이상의 수출 실적을 달성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엽연초 수출 사업으로 재미를 본 나는 다음 사업 구상에 들어갔다. 당시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고, 그러다 떠오른 것이 바로 ‘마그네시아 크린카’였다. 쇳물을 녹일 때 용광로도 같이 녹지 않게 하려면 그 벽면을 벽돌로 둘러싸야 했다. 그래서 밀가루처럼 생긴 백운석을 구워 반죽을 했는데, 해수가 필요했기 때문에 인천 인근 한 섬에서 물을 대며 마그네시아 크린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삼화화성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고, 한양대의 전풍진 박사를 회사 고문으로 불러왔다.

이 사업을 제대로 성공시키려면 롤 모델이 필요했다. 그 때 압록강 수력발전 사업에 공을 세운 동경대 전기공학과 출신의 노구지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 전 박사와 함께 노구지가 설립한 일본 규슈의 전기화학 공장을 견학하기 위해 무작정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 가동 모습을 직접 보는 건 쉽지 않았다. 남의 기술력을 엿보기가 어려운 건 어쩌면 당연했다.

전 박사와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에 크린카 공장이 있다는 걸 알고는 곧바로 독일로 향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공장 견학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게 된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US스틸이었다. 이 회사는 자체 크린카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다. 기회다 싶어 공장으로 찾아갔으나, 공장장조차 만날 수 없었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배짱이 두둑했던 나는 담당 부사장에게 직접 찾아가 “공장 견학을 할 수 없다면 돌아가겠지만, 우리의 다음 선택은 공산권 국가다. 크린카 광석이 공산권 국가에서만 나니까 직접 가서 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난감해진 부사장은 “저녁 10시까지 생각해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정확한 시간에 연락이 왔다. 공장 견학을 허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공장장이 우리를 안내했고, 전 박사와 나, 당시 물리학자였던 동생 기용과 함께 크린카 공장 견학을 시작했다.

하지만 견학만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알기는 어려웠다. 땅속으로 깔린 파이프라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뿐더러, 공장 전체를 샅샅이 둘러보는 건 불가능했다. 알든 모르든 나는 공장장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고, 미리 준비해온 메모지와 연필을 바지 주머니 속에서 더듬더듬 찾아 어둠 속에서 기록을 했다.

서울로 돌아온 우리는 결과적으로 50%의 성과를 거뒀다는 자축을 했다. 그 때 내가 깨달은 건 기술을 모르면 어렵고 알면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마그네시아 크린카 사업은 내게 생소한 새로운 사업이었지만, 결국 끈기와 노력으로 일궈낼 수 있었다. 물론 이 사업은 개인이 키우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박충헌 상공부 장관에게 “국가적 사업이니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당시 정부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결국 포항제철로 넘어갔다. 개인사업으로는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없지만 결국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을 하나 남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엽연초로 큰 성공을 거뒀던 나는 사실상 삼화화성으로 쓴 맛을 봤다.

한국에서 홀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 보니 무역을 제대로 하려면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번듯한 사무실을 얻기도 어려웠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는 법이라, 종로의 장안빌딩에 둥지를 텄다. 그게 바로 한국무역협회의 시초였다.

삼화제지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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