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 조건이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학설을 규명해 우리 민족성을 반도성(半島性) 정체성(停滯性)으로 규정한 일본의 식민사관을 붕괴시킨 고(故) 이기백(1924~2004) 서강대 교수.
그의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선친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덴마크를 부흥시킨 그룬트비히의 ‘그 나라의 말과 그 나라의 역사가 아니고는 그 민족을 깨우칠 수 없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하셨다…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나는 해방 당시 일본군에 끌려가 만주에 있었다가 1946년 1월 귀국, 서울대에 편입해 공부를 계속했는데 이병도, 손진태로부터 우리말로 강의를 들으며 감격해 했다.” 생전에 그는 역사학도가 된 배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 근ㆍ현대 역사학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역사학자들이 역사학도로서의 일생을 회고한 글이 한 자리에 모인다. 3월중 지식산업사에서 발간할 예정인 <역사가의 탄생> (가칭)에서 고 이기백 교수, 고 고병익(1924~2004) 서울대 교수, 이원순(82) 전 국사편찬위원장, 차하순(79) 서강대 명예교수, 김용섭(77) 연세대 명예교수, 유영익(72) 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등 한국 근ㆍ현대사학의 발전을 주도한 사학자 6명은 짧은 자전(自傳) 형태의 글을 통해 왜 역사가의 길을 걷게 됐으며, 연구분야는 무엇이었고, 사관(史觀)은 어떻게 구축됐는지 등을 밝힌다. 역사가의>
이들을 역사학자의 길로 이끈 동력은 식민지, 좌우 대립,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숨가쁘게 이어진 ‘시대의 불운’이었다.
이원순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역사학도로서의 투신계기는 식민지 체험에 기원하고 있다. 그는 “소학교 4학년 때 일본어와 일본사를 국어, 국사라는 교과목으로 공부했던 역사적 슬픔은 큰 충격이었다”며 “1945년 해방 직후 우리 글,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학생층 뿐 아니라 각층의 사회인까지 우리글, 우리역사를 배우고자 강습회와 야학 등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방조국의 새 역사 역군으로 나서는 것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의 기반이 된 조선후기 농업사연구의 직접적 동기는 6ㆍ25 체험이었다고 했다. 그는 “해방 후 신생국가에 필요한 것은 농업, 상공업 등의 경제사학이라고 생각하며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6ㆍ25가 발발했다”며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전쟁의 원인이 한말 일제하 이래 계급문제, 사회모순의 집약이라고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 사회모순의 누적으로 민족내부의 전쟁으로 갈등이 폭발한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게 됐으며, 조선후기농업사연구로 발전했다고 덧붙였다.
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는 유럽근대사상사 전공자인 자신이 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발언을 하게 된 계기를 캠퍼스에서 격렬한 시위와 최루탄이 난무하던 군사독재기의 체험에서 찾는다.
그는 “1970년대 이래로 역사학계는 과거지향적인 랑케식 사실주의를 신봉하고 있었으나, 진정한 역사가라면 현실문제에서 초연할 수 없으며 전공분야에 상관없이 현대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1980년 여름 현대사회의 문제를 대중화하려는 ‘현대사’라는 전문지를 냈다가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창간호만 내고 종간했다”고 회고했다.
차 교수는 이번 책의 발간에 대해 “논문 이외에 스스로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 드문 역사가들이 집단적으로 자기고백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역사를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선학들이 어떻게 학문에 투신했는가를 알려주는 길잡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책은 2002년부터 열리고 있는 한ㆍ일역사가대회에서 양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13명이 ‘역사가의 탄생’을 주제로 발표한 글을 묶은 것.한국을 대표하는 사학자들의 개인적인 경험이 어떻게 역사 연구로 이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의 관심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나카스카 아키라 (中塚明) 나라여자대 명예교수 등 7명의 일본학자들의 글이 함께 실리며, 국내 출판에 맞추어 일본어판이 출간될 예정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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