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월남 작가 최영림(崔榮林, 1916-1985). 한국 화단의 목가적 서정주의를 대표하는 그는 사실 이중섭이나 박수근처럼 미술사와 미술시장이 뜨겁게 호명하는 작가는 아니다. 다작인 탓에 범작이 많은데도 중요한 작품은 평생 팔지 않았으니 시중에 돌아다니는 것은 대부분 태작(駄作)이고, 작고 직전 소중히 지켜온 작품들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으나 1985년 기증유작전 이후 대표작들을 망라한 전시는 열리지 않았다. ‘국민화가의 재발견’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다.
한국 대표작가로서의 최영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규모 전시가 서울 정동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일본 아오모리현립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최영림과 그의 일본 유학 시절 스승인 무나카타 시코(1903-1975)의 2인전.
일본 특유의 장식미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무나카타 시코는 베니스비엔날레와 상파울로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판화 작가로, 최영림의 작품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시는 사승관계에서 비롯된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비교ㆍ대조함으로써 최영림을 미술사에 온당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기획됐다.
두 사제의 공통점은 전통에 근거한 에로틱한 여성 이미지에서 가장 현저하다. 한국적 해학미가 두드러지는 최영림의 건강한 에로티시즘과 대상의 패턴화를 통한 무나카타의 화려한 에로티시즘은 세부갈래는 달라도 대지의 어머니로서의 여성과 에로스를 양립시킨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민담이나 전설, 영웅담 같은 이야기를 그림 속에 담고 있다는 점, 불교적인 소재와 세계관을 드러내 강조한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최영림의 작품에서 무나카타의 영향은 오래 묵은 후에야 우러나온다. 작품을 직접 배운 1930년대에는 흔적도 없던 무나카타의 그림자가 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우리 고유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당대의 요구 때문이었다. 제자는 일본 전설과 영웅담, 불교적인 것에서 소재를 취하는 스승의 작품세계를 면밀히 연구하기 시작했고, 배울 만한 것을 엄정히 취사선택한 후 한국 고유의 내재적인 요소들과 결합시켰다.
황토의 질감 속에 율동하는 나부(裸婦)들과 흩날리는 꽃잎을 그린 ‘꽃바람’, 새색시를 훔쳐보는 신랑과 수줍은 미소의 각시 등 혼사의 한 장면을 해학적으로 그린 ‘경사날’, 포도밭 아래 두 남녀의 뜨거운 정념을 건강한 활력으로 표현한 ‘포도밭 사연’ 등은 그렇게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한 최영림이 선사하는 ‘눈의 호사’다.
“화면 속에서 토담벽 같은 느낌이 우러나오길 바랐다”는 최영림의 작품은 진흙과 모래를 섞은 토속적 마티에르로 따스하면서도 온화한 정감을 자아낸다. 부드럽고 풍만한 이 땅의 여체는 두고두고 정겹다. 근대미술사가 미필적 고의로 은폐해온 두 작가의 영향관계에 기죽을 필요가 없다.
기혜경 덕수궁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최영림과 무나카타의 관계는 우리 미술사가 직시하고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산”이라며 “이번 전시는 저평가된 최영림을 제자리에 위치지음으로써 근대미술사의 정립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마련됐다”고 말했다. 3월30일까지. 입장료 성인 4,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2,000원. (02)2022-0600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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