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매우 드라마틱했다. 일본 강점기 중엽. 서울 서대문 천연동 금화산 줄기 아래 신식 한옥마을. 오색 병풍 사이로 들려오는 새소리, 시내소리 그리고 창문만 열어도 코끝을 스쳐가는 꽃 향기. 나는 우리 동네가 참 좋았다.
서울이 직장인 아버지(하치현)는 자식들이 자라자 고향 부산을 떠나 이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애국지사 백범 김구선생, 작곡가 박춘석 선생, 코미디언 구봉서 선생,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최초로 밟은 가수 김시스터스 등 한국의 수많은 명사들이 이 골짜기에서 태어나고 살았다.) 우리 집은 매우 유복했다.
어머니(이명선)는 대학생인 큰형과 둘째 형이 학병(일본군)에 끌려가지 않게 해달라고 구포(부산)에 암자를 짓고 거의 그곳에서 기도생활을 하셨다.
기적같이 두형은 학병에 끌려가지 않았다. 특히 둘째 형은 가미가제(비행기를 타고 미군함대에 날아가 자폭하는 부대)로 차출되었으나 비행기 타는 날 8ㆍ15 해방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우리는 지금도 어머니의 지성이 기적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해방이 된 기쁨으로 4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4남4녀의 균형을 깨고 아홉번째로 나를 잉태하셨다.
그러나 행복이 넘치던 우리 집에 갑자기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졌다. 생후 1년 3개월, 이번에는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6ㆍ25전쟁이 일어났다.
생후 3년 4개월, 미군이 쏜 포탄이 우리 집 안채로 날아와 아버지마저 뺏어가 버렸다. 나는 어머니를 문병하러 부산에서 올라온 어머니의 고모 손에 키워졌다. 그 할머니 또한 나를 키우느라 불행히도 남편에게 소박 당해 평생을 홀로 사셨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재앙을 일으키며 커 갔다.
전쟁이 끝나고 나는 할머니 손에서 내가 태어난 천연동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매우 낯설었다. 그 곳에는 큰형 가족 외 결혼 안 한 둘째, 셋째, 막내 누나와 셋째, 막내 형 등 모두 11명이 살고 있었다.
커다란 한옥(폭격 당한 후 신축) 대청 액자 속, 한 쌍의 선남선녀가 환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저기 있는 저 여자 누구야? 정말 예쁘네." 나는 물었다. 가족들이 눈이 동그래져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지 누구야?"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응? 그 옆의 남자는?" 모두들 나를 껴안고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그들이 왜 우는지 몰랐다. 나는 그 때까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뭔지, 누구인지 어느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가 나한테 너무너무 잘 해 주었기 때문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커가면서 사람들이 할머니를 무시하거나 눈치를 주면 누구하고도 싸웠다.(영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는 나를 어머니 대신 키워주시고 사랑하여주신 나의 할머니에게 바친 영화이다.) 집으로 돌아 온 나는 너무나 좋았다. 이렇게 나에게도 집과 많은 형제들이 있다니…. 어머니는>
그 때 나는 나의 9남매를 처음 한 곳에서 만났다. 그 중에 막내형이 가장 눈에 띄었다. 이름은 길종. 그는 나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내가 가장 사랑한 나의 형, 어린 내 눈에 비친 길종 형에 관한 매우 사적인 얘기를 이제부터 잠시 하겠다.
처음 내가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집으로 돌아 온 초등학교 4학년이 돼서다. 형은 나보다 여섯 살이 많았다. 그는 깜박이는 고운 눈과 긴 목이 마치 학 같았다.(길종 형은 38세 짧은 생을 살았다.)
나는 그의 방에 함께 있게 되었다. 형은 말이 적었으나 매우 다정하였다. 형은 음식 솜씨가 좋았다. 특히 떡볶이를 맛있게 만들었다. 그는 식구들이 싸우지 않게 프라이팬에 퉤퉤 침을 뱉는 시늉을 하여 접근을 못하게 한 후 공정히 나눠주었다. 형은 웅변을 잘 하였다.
일요일엔 집 마당에 식구들을 모아놓고 영어웅변으로 웃음과 박수를 터지게 하였다. 그리고 이야기꾼이었다. 나는 형 이불에서 함께 잤다.(1964년 그가 프랑스로 유학 갈 때까지) 잠들기 전 늘 옛날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한참 재미있는데 끊어진다 하면 코를 골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야기가 막히자 자는 척 한 것이다.
이야기들은 몽땅 그가 만든 거였다. 운동과 공부도 잘 했다. 태권도 1단(형은 2단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형은 주말이면 금화산 꼭대기 '말바위'로 동네아이들을 몰고 올라갔다.
산을 타며 곤충도 잡고 꽃도 따고, 아이들을 모아놓고 웅변도 하고 웃기고, 함께 놀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형을 몹시 따랐다. 별명이 '하길동'이었던 형은 이웃 옥천동, 냉천동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동네아이들은 주먹 센 아이들에게 억울하게 당하면 형이 있는 '말바위' 꼭대기까지 달려왔다. 어느 날 형이 독수리같이 동네로 날아갔다. 상대는 세 동네에서 가장 이름난 주먹. 마침내 금화초등학교 운동장에 동네 아이들이 모인 가운데 결투가 벌어졌다. 상대가 외쳤다.
"감히 네 형 친구인 나에게!" "약자를 건드리는 놈은 용서 할 수 없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형의 옆 발차기가 공기를 가르며 날았다. 마치 나비 같았다.
그의 두 손과 두 발은 이미 상대의 얼굴과 가슴에 꽂혔다. 주먹은 그대로 쓰러졌다. 이후 우리 동네에는 주먹이 사라졌다. 하길종 감독은 '이소룡영화'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이소룡을 보면서 십대 때의 자신을 회상하며 즐겼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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