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정몽준 의원과 한승주 전 외무부장관 등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대미 특사단이 지난 주 워싱턴을 다녀 갔다. 전례가 없던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이 성사된 마당에 특사단이 스스로 소임을 다했다고 평가한다 해도 크게 책잡힐 일은 아닐 것이다.
특사단장인 정 의원은 "이번엔 주로 미국쪽 생각을 듣기 위해 왔다"고 강조했는데, 특사단의 빡빡했던 일정을 감안하면 그 목적도 어느 정도 충족된 것 같다.
■ 좌파에 기댄 노 정부 대미외교
정 의원 등이 전한 바에 따르면 미측이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는 '노무현 정부에서는 한미 간에 충분한 사전협의가 없었다', '노 정부가 외교ㆍ안보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것 등 두 가지로 간추려진다.
미측은 사전협의 부재의 대표적 사례로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불과 발표 수시간 전에야 통보 받은 사실 등을 거론하고 있다고 한다.
특사단은 이와 관련, "미국에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물론 없지만 동맹 간에 핵심 정보를 차단하거나 심지어 숨기는 것은 당당한 외교가 아니었다"고 노 정부를 비판하면서 미측 입장에 동조하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지난 5년간의 한미관계를 돌이켜보면 이는 상당 부분 근거가 있는 지적이다.
외교라는 것이 동맹 간에도 서로 주고 받는 것이 기본인데 이러한 '비소통'의 상황에서는 미국이 중요 정보를 우리에게 알릴 필요를 못 느낀다 해도 우리로서는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미국의 조야가 노 대통령 정부에 의한 '외교ㆍ안보 문제의 정치적 이용'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부분은 좀더 복합적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노 정부가 이른바 '자주(自主) 코드'를 앞세우면서 국익의 정교한 구현보다는 지지 세력에 대한 영합에 더 치중한 '확성기 외교'를 벌여온 점은 딱 잘라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당선인의 새 정부라고 해서 이 같은 한국 정치의 병폐에서 완전히 절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현재로서는 성급하다. 노 정부가 좌파에 구애했다면 보수적인 새 정부는 우익에 기대려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선 이 당선인이 1,2년이 아니라 유한한 정권을 뛰어넘어 적어도 10년, 20년을 내다볼 수 있는 긴 안목의 외교ㆍ안보 정책을 마련, 이른바 '창조적 실용주의'가 허언이 아님을 입증할지 지금부터 지켜볼 일이다.
서울로 돌아간 특사단이 이러한 내구성 있는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번 특사 외교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레임덕 부시와의 밀월 신중히
역으로 '외교ㆍ안보 문제의 정치화'와 관련해 더욱 깊이 새겨야 할 것은 미국이라고 해서 그러한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이라크전의 수렁에 빠진 채 자칫하면 어떠한 외교적 성과도 없이 물러나야 할 위기에 처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뭐라도 하나 건지자'는 유혹은 한층 강렬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미국의 성급함으로 북 핵 문제가 졸속으로 흐르지 않도록, 한미관계에서 미측이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고 경계해야 할 책무가 이 당선인의 새 정부에 주어져 있다.
나아가 미국의 차기 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이 당선인 정부로서는 야박하다고 느낄 정도로 미측에 많은 숙제를 내서 이를 다음 정권에서도 검토하게 해야 할 것이다. '레임 덕' 부시 행정부와의 밀월 관계에 미련을 둘 때가 아닌 것이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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